가정의 달 5월에 부치는 글
5월은 온갖 만물이 힘찬 활동을 시작하고, 겨우내 움츠린 공기로 찌들었던 세상이 햇살 가득 다스함으로 숨쉬는 계절-
올 해 유난히도 길었던 추위가 마음마저 움츠리게 만들었지만, 어느새 신록이 짙어 가는가 싶더니 이젠 제법 햇살이 따갑습니다.
그래서 오월을 가정의 달이라고 했나 봅니다.
가정의 달에 즈음하여 진정한 가족에 의미는 무엇이이며, 부모로부터 받은 교훈이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어떻게 지켰는지 생각해보기로 합니다.
45년 전의 일입니다.
같은 학교에 다니는 두 장애소년이 있었습니다.
봄비가 내리는 등굣길이었습니다.
등에 업혀 가는 외소하고 작은 소년이었지만, 한 손에 우산을 들고 한 손으로 아이를 업고 가는 어머니는 힘에 겨워 이마에 땀이 송송 맺혀 흐르고 있었습니다.
또 다른 한 소년은 무거운 가방을 등에 메고 양손에 목발을 집은 채 가냘픈 다리를 휘청거리며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우의를 입었지만 스며드는 빗물에 옷은 이미 흠뻑 젖어 버렸습니다.
소년을 업고 가던 어머니가 힘겹게 걸어가는 아이를 향해 말했습니다.
“가방이 무거워 힘들겠구나. 이리주렴. 가는데 까지 들어다 줄게...”
그러나 엄마한테 혼난다며 소년은 단호히 거절하더니, 더욱 가냘픈 다리를 흔들며 멀어져 갔습니다.
...에구 모질기도 해라. 어린 것에게 얼마나 야단을 했으면 도와주겠다는 것을 저렇게 거절할까...
소년을 업고 가던 어머니가 안타까워하며 혀를 찼습니다.
사람들은 말하길, 자식은 품안에 자식이며 정성을 들여 가르친들 부질없고 소용없는 일이라 했습니다.
또 어떤 이는 무자식이 상팔자라 하였습니다.
혹은, 아이가 먼 훗날 편하게 살기 위하여서는 재산이 제일이라며, 공부도 치우고 아이를 위해, 재산이나 물려주라고 모두들 입을 모았습니다.
어른들이 하는 말과 뜻을 알아듣지도 알 수도 없었지만, 세월이 흘러 두 소년은 어른이 되었습니다.
목발을 집고, 결석 한 번 하지 않은 소년은 초등학교 졸업하던 날 개근상을 받았습니다. 비오는 날 이면 옷이 흠뻑 젖어 다음날 감기 몸살로 앓아눕기도 하였고, 눈이 오는 날이면 미끄러운 눈길에 수없이 넘어져 멍이 가실 날이 없던 소년은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전교에서 1등을 거의 놓쳐 본 일이 없었습니다.
삯바느질하는 어머니와 단둘이 살았던 소년은 살림이 넉넉지 못하여, 늘 가난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집안 형편이 워낙 어려워 대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더욱 준엄하게 대학을 가야한다고 나무랐습니다.
그러나 철이든 아들은 어머니의 꾸짖음에 승복하지 않고 대학을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다음날 어머니는 희미한 전등불 밑에서 밤새도록 재봉틀에 앉아 일만하시던 모습과는 달리 정갈하게 한복으로 갈아입었습니다.
저녁 밥상도 아주 푸짐하게 차려놓은 채 아들과 단둘이 마주하였습니다.
아들은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느냐고 어머니께 물었습니다.
“오늘 에미가 네게 차려주는 마지막 저녁이니, 맛있게 먹자구나...”
어머니는 당혹해 하는 아들 앞에 신문지로 똘똘 쌓은 커다란 돈뭉치를 내밀었습니다.
“네가 대학에 합격하면 등록금으로 쓰기 위하여 그동안 준비해둔 것이다. 네가 학업을 포기한다니, 나도 이 돈을 쓸 곳이 없어 졌구나. 이것은 너를 위해 마련한 돈이니 네가 쓰거라...”
자유롭게 활동할 수 없는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훗날 재산을 물려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지혜와 능력 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에 아들을 열심히 가르쳤다는 어머니는 이제 아들이 대학을 가지 않겠다하니, 더 이상 자식을 위하여 할 일이 남아 있지 아니하며, 이 시간 이후는 자신이 스스로 생활을 개척 할 수 있도록 오늘 저녁을 마지막으로 어머니 곁을 떠나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들도 단호한 어머니 말에 야속도 하였고 몹시 화도 났습니다. 그리곤 성공하여 돌아오겠노라며 그 길로 어머니와 헤어졌습니다.
한 편. 어머니 등에 업혀 초등학교를 졸업을 한 소년도 어른이 되었습니다.
그는 집안의 형편이 나아 비교적 윤택한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결혼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자기중심적으로 생활을 하였던 그는 번번이 직장생활에서도 적응을 하지 못하였고, 활동에 불편한 사람이기 때문에, 자신은 도움을 받아야하는 사람이라는 습성이 생활화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아내는 자신을 모든 것을 도와 주고 보조해 줄 수 있는 슈퍼우먼이기를 바랐습니다.
결국 아내는 장애남편을 도아 주는 도우미의 존재 밖에 될 수 밖에 없다고 선언하며, 결혼 4년 만에 두 사람 사이에 아이 하나를 남긴 채 이혼을 했습니다.
어느 날 장애인 고충상담소에 자신의 아들이 대학에 갈 수 있도록 뒷바라지 해줄 수 있는 배우자를 소개해달라는 장애인이 찾아왔습니다.
자신은, 최고의 성적으로 명문대학을 졸업했으며, 우리나라 최고의 회사에서 근무했었노라고 소개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능력과 실력을 사회가 인정해주지 못한다며, 자신을 뒷바라지 해줄 수 있는 배우자를 소개해 줄 것을 간곡히 부탁하였습니다.
상담사는 그를 한참 바라보다가 아련하게 지난 시절이 생각났습니다.
“혹시...△△초등학교 졸업하시지 않았습니까?”
“어?... 6학년 *반... 너...”
40여 년 전 헤어졌지만 서로가 서로를 동시에 기억해 내었습니다.
장애인 고충상담을 20여 년간 해온 그는 반백이 되어 동창을 만난 것입니다.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눈이 오면 눈을 맞으며, 누구의 도움 없이 스스로 자신의 일을 해결해 내었던 그가 대학을 포기하고 어머니를 떠났던 그리고 결혼하여 어여쁜 아내의 남편으로서 두 아이의 아빠로서 오늘을 살았노라며, 두 사람은 이야기꽃으로 밤을 새웠습니다.
친구를 위해 진솔한 사람을 찾아 맺어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였지만, 그 후로 그 친구는 두 번 다시 장애인고충상담소를 찾아오지 않았고, 만날 수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한 통의 E-mail을 받았는데, 그곳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습니다.
“...친구여, 난 어릴 적 아버지 모습이 싫었어. 독선적이고, 이기적인 행동으로 술에 취한 아버지는, 칼날 같은 음성으로 날을 세운 어머니와 매일 밤 싸우는 것이 싫었어.
그래서 아버지의 목소리이며, 뒷모습이며, 심지어는 걸음걸이 까지 싫어서 그렇게 닮지 않으려 했건만......
언제부턴가 거울 앞에 서 있으면 그 속에 내 모습은 간 곳 없고 더욱 아버지를 닮은 내가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오십이 넘어서 비로소 이제야 깨달았다네.
시간이 흘러 세상이 변하고 흰머리가 늘어갈수록, 내 모습은 나는 내가 아니라 바로 아버지라는 것을...”
필자 소개 (지체장애 1급)
-한국애인문화협회 중앙회 상임이사 / 상임부회장
-한국애인문화협회 부설 푸른상담소 소장
-한국장애인결혼단체연대 회장
-보건복지가족부 장애인사회참여평가단 전문위원 역임
-대한민국장애인문화예술대상 심의위원회 부위원장
-대한장애인다트연맹 부회장
-월간 푸른하늘 편집위원
-시․수필 300여 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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