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도기행 세번째이야기(이즈하라 편)
휠체어 배낭여행을 하면서 대마도 사진기행을 하는 것을 사람들은 퍽 신기한가보다.
보통 사진가들은 종일 걸으면서 순간 포착을 하거나 자신이 원하는 영상을 카메라에 담는게 일상이다.
그러나 휠체어에 몸을 싣고 사진을 찍는 모습을 일본에서도 낮설어한다.
안보는 척, 못본척 하며, 곁눈으로 관심 깊게 우리일행을 주의 깊게 바라보기도 한다.
사진찍는 일은 어찌보면 중노동이다.
하루종일 로드워크하며 자신의 눈에 비친 세상을 담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일은 아니다.
그러나 나도 일반 사진가들과 다를게 별로 없다.
다만 휠체어에 몸을 싣고 사진을 찍을 뿐이다.
2015-09-21(부산-이즈하라)
어제 모두들 장거리를 전동휠체어를 달리고도
저녁시간에는 부산역에서 자갈치시장과 국제시장 그리고 깡통시장을 밤이 깊도록 돌아다닌탓에
아침 6시까지 휠체어가 모두 완전 충전이 되지 않았다.
피곤한 탓인지 어제보단 몸들이 무거운것이 역력해 보였다.
숙소를 나오는 순간부터 시간이 지체되니 밖에서 초조히 기다리는
가이드 윤영원소장에게 미안해 눈치가 보였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출국장에서 안전에 안전을 거듭하던 내가 큰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축국직전 승선이 시작되어, 서류를 확인하는 순간, 여권등 다른 서류는 모두 있는데 들고있던 승선권이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당황했다. 내가 움직였던 동선을 따라 화장실까지 가보았지만 승선권은 없었다.
다급하여 티켓팅한 대아고속해운을 찿아가 사정을 했더니
수기로 쓴 임시 티켓을 재발급해 주어 가까스로 승선할 수 있었다.
어이없는 실수였다.
어제 멀미로 고생한 재남씨를 남겨두고 떠나는 마음이 아쉬웠다.
함께 했으면 끝까지 하는 것이 나의 성격이라 두고두고 마음에 걸렸다.
함께 못하는 서운한 감정을 마음속으로 간직할 수밖에 없었다.
2시간10분을 쾌속선을 타고 현해탄을 달려와 대마도 이즈하라항에서 입국수속을 하는데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또다시 벌어지고 말았다.
모두 입국 수속을 마쳤는데 홍성희씨가 보이지 읺았던 것이다.
분명히 여객선에서 다른 장애인들의 하선을 도와주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마지막으로 나와야 할 그가 보이지 않으니 당황했다.
입국장을 나왔으니 다시 돌아가 확인할수도 없어
무작정 기다리는 침묵의 애타는 시간이 얼마나 답답했던지....
10여 분이 지나서야 비로서 그의 모습이 보였다.
입국수속에 기재해야 할 몇 가지 기재사항을 누락하여
확인하느라 맨나중에 나온 것이란다...
어이없었다.
암튼 오늘 아침은 우여곡절 끝에 일본에 도착할 수있었다.
하늘은 어제에 이어 푸르다 못해 청명하게 맑았다.
오늘의 여행 코스는 짧지만 의미 있는 곳을 돌아볼 예정이다
이즈하라항구에서 멀지않은 대마도주 가네이시 성터에 남아있는
덕혜옹주가 결혼후 방문을 기념하여 세워졌다는 결혼봉축 기념비와
조선통신사가 머물던 시작이 바로 대마도의 이즈하라이다.
우리나라의 뜻을 전달하러간 사절들의 흔적을 따라
역사의 장소를 찿아 가는 나의 발걸음은 설레이기 조차했다.
덕혜옹주에 대하여...
그녀는 1912년 5월 25일 조선 제26대 왕(황제) 회갑을 맞은 고종(高宗)과 궁녀인 복녕당(福寧堂) 양귀인(梁貴人)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가 측실이었기 때문에 옹주(翁主)라고 호칭했다.
덕혜옹주는 고종의 고명딸로, 세심한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고종에게는 모두 4명의 딸이 있었지만 모두 1살이 채되지 못해 사망하였기 때문에 덕혜옹주가 외동딸이었다.
그녀는 일본에 볼모로 잡혀가 순탄치 못한 삶을 살다가 여인으로서 시대에 가장 기구한 운명으로 살다간 우리나라의 마지막왕의 귀한 공주님이시다.
1931년 5월 쓰시마섬[對馬島] 도주의 후예인 소 다케유키[宗武志]와 정략 결혼하였고
다음해인 1932년 8월 14일 딸 정혜(正惠:일본명 마사에)를 낳았다.
그러나 결혼 후 덕혜옹주의 병세가 더욱 악화되었으며 남편과 주변사람들의 간호에도 병세가 호전되지 않자
1946년 마츠자와 도립 정신병원에 입원하였다.
결국 1955년 다케유키와 결혼생활을 더이상 유지하기 어렵게 되자 이혼하게 되었고,
어머니의 성을 따라 양덕혜(梁德惠)로 일본호적을 만들었으며 약 15년 동안 마츠자와 정신병원에 입원하였다.
외동딸이었던 정혜가 1956년에 결혼하였지만 이혼하였고
3개월 뒤 유서를 남기고 일본 남알프스 산악지대에서 실종되었으나,
그녀가 현해탄에서 투신하여 자살한 것으로 세간에는 오해되고 있다.
마침내 1962년 1월 26일 덕혜옹주는 귀국하였지만 귀국 20년이 지나서
1982년에 호적이 만들어졌고, 결국 실어증과 지병으로 고생하다가
1989년 4월 21일 낙선재에서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金谷洞)에 있는 홍유릉(洪裕陵)에 묻혔다. (-두산백과사전 발췌)
하루 일정을 카메라로 담았다.
대마도 사진기행의 두 번째 날 아침. 부산항국제여객터미널로 가는 아침하늘은 맑고 청명했다.
우여곡절 끝에 배를 타고 쾌속으로 물위를 달리는 오션플라워호의 창너머로 보이는 현해탄은 푸르게 빛났다.
부산을 출발한지 2시간 10분만에 대마도 이즈하라 항에 도착하여 두 번째 대마도 땅을 밟았다.
닐 암스트롱이 달에 첫발자국을 남기는 기분으로 이즈하라에 첫 발을 내딛는 순간의 벅찬 기쁨도 잠시...
홍성희씨가 10여분 동안 출구에서 보이지 않아 기다리는 일행은 초조한 시간이었다.
이즈하라에 도착하자마자 곳곳에 조선통신사 행렬의 그림이 홍보물처럼 있었다.
우여곡절을 겪은 후 로드워크를 하며 내눈에 비친 세상을 카메라에 담았다.
히타카쯔에서 약 70여km 떨어진 이곳의 거리도 깨끗하고 정갈하기는 같았다.
좁은 길은 정갈하게 정리 정돈하여 지나는 마음나저 정숙하게 하는 일본인의 정신은 높이 평가할만하였다.
집앞의 골목마다 정돈이 잘 되어 있어 이들의 집안도 들여다 보고픈 충동이 일기도 했다.
도로 한가운데에 대형 배수로 맨홀이 몇 미터간격으로 보인다.
우리나라보다 비가 몇배나 많이 와도 홍수가 나지 않는 이유가 여기 있었다.
도로 바로 아래가 대형수로이고 복개를하여 맨홀로 덮어 놓으 것이다.
우리는 배워야 한다. 알아야 이길 수 있다.
축소지향의 일본이 정교하고 정밀한 전자제품로 세계를 장악했던 70~80년대 코끼리 전자밥통이 우리네 주부에겐 한대쯤 갖는 것이 로망이었지만,
이젠 우리가 휴대폰으로 컴퓨터로 이들을 따라 잡았지만,
이들을 이기고 세계 1등국으로 되기 위하여는 이들의 정신을 이해하고, 배우고, 알아야 한다.
그러나 얼마니 부끄러운 일인가? 배워도 시원치 않은 이 땅에 우리가 남기고 온 것은 이들의 담장과 화단에 함부로 버려진 쓰레기이다.
오죽하면 이들이 곳곳에 서투른 한국어로 쓰레기를 버리지 말아달라고 표어처럼 벽보를 해서 붙여 놓았을까...
한국인으로서 부끄러웠다. 창피했다. 반성을 해야한다.
이 동네에서 제일 크다는 상가에서 점심으로 우동을 먹었다.
작지만 정성을 다해 손님을 모시고 서비스하는 정신 참 아름다웠다.
전자오락실 게임소리는 요란하게 밖으로 흘러나왔지만, 문을 살짝열고 빼꼼히 들여다 보았지만 손님이 없이 텅비어 있었다.
좀 더 시간이 지나야 사람들이 활동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몇 블럭 지나면 고요하기까지한 대문앞에 조상을 모시는 작은 신사를 만들어 놓고 향을 피워 놓고 꽃이 놓여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낮설지만 특별한 모습이었다. 혹시 조상의 기일이었을까...?
이 동네에서 제일 번화가 란다. 버스도 다닌다. 이곳에 와서 처음 버스를 만났다.
조로가 좁으니 승용차는 90%가 경차였고, 승합차도 거의가 우리의 다마스 처럼 작았다. 짐차도 모두 라보 같은 1톤 미니트럭이었다. 내가 소인왕국에 온 것 같았다....
덕혜옹주 결혼기념비가 있는 다케이시 성터입구는 관광차가 줄을 잇고 있었지만 관광객과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길을 따라 오르니 잠시 후 대마도주의 다케이시 성터가 위풍당당하게 서 있었다.
다케이시 성터를 알리는 이정표가 막 지나자
덕혜옹주 결혼봉축기념비를 알리는 이정표가 보인다.
사실 덕혜옹주 봉축비도 많은 한국인들이 다녀가자. 뜻 있는 한국계 몇몇사람이 뜻을 모아 길섶에 버려진듯 쓰러져 있는 것을 세우고 바로 잡아 오늘에 이른다고 전한다.
보잘것 없는 대마도 성주의 성을 보존키 위해 정리하고 다듬어 한국민의 최대 관광 유적지로 만들어 놓은 이들의 상술이 밉기도 하지만 배워야한다. 이들의 정신을...
다케이시 정원(일본식정원)도 고요한 정숙함이 있었지만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 볼만큼은 아니어서 멀리 망원으로 한 컷 찍기만 하였다.
다께이시 성터 내부의 정원과 수목은 잘 정돈 되어 있었다.
그 옛날 덕혜옹주가 이 땅을 밟고 지나가셨으리라...
공주가 다녀가신 그 길섶에
꽃무릇이 슬프로록 아름답게 붉은 빛으로 피워 있었다.
잎이 5~6월 지고 나면 7~8월에 붉은 꽃을 피운다는 꽃무릇은 영원히 잎과 꽃이 만날수 없어
서로를 그리워하는 애절한 전설과 함께
영원한 그리움이라는 슬픈 꽃말을 갖고 있다.
햇살에 불타는 붉은 꽃무릇이 아름답다 못해 슬프도록 보이는 것은
격동의 시절 우리나라 마지막 공주로 태어나
볼모로 잡혀 있다가 슬픈 운명으로 세상을 마감해야 했던 덕혜옹주의 넋을 만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우리의 길고양이... 그러나 이곳엔 천연기념물로 보호종이란다.
오랜 세월을 지켜온 역사의 증인이 되어버린 목조건물의 성을 되돌아 보면서
2박3일의 짧은시간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고, 반성하면서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을 잡을 수 있었다.
단순히 역사의 유적을 돌아본 것이 아니라
이 들의 삶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근면과 정갈한 청결함 그리고 친절한 서비스로 세계 일류국가가 된것이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우리가 알고 깨닿을 수 있다면
이들을 비난하고 나무라기 이전에
깨닿고 배우고 실천해야 앞설수 있으며 이길수 있지 않을까...
이곳이 깨끗하고 푸르게 맑은 이유는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오늘 지금 이 순간까지 끊임없는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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