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아가는 이유

아내라는 이름만 생각해도 가슴 뭉클한 그 날의 그 사람!!

서울의푸른하늘 2012. 6. 12. 12:16

이름만 생각해도 가슴 뭉클한 그 날의 그 사람!!

 

  어설픈 잠을 뒤척이다가 깨어 좀처럼 다시 잠들지 않는 한 밤-

  깊이 잠든 아내의 고른 숨소리에 쉽사리 잠이 들 것 같지 않아 25년 전 그 날의 아내 모습을 추억해 봅니다.

  쉬흔하고 일곱인 지금의 내 나이...

  이젠 살아 갈 날 보다 살아온 날이 분명 많은 내게 그 날을 추억함은 차라리 잠이 오지 않는 이 시간이 얼마나 다행한지 모르겠습니다.

  장애인을 위한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의 모임으로 시작 된 한 단체의 회장으로 활동하던 시절-

  우연한 첫 만남으로 내 인생을 바꾸어 버린 그녀를 생각하며 오늘은 밤을 새우려 합니다.

 

 

 

 

서울대공원 장미축제에서

 

 

  19875월의 어느 봄 날로 기억됩니다.

  초여름을 버금가는 땡볕에서 앞마당의 잡초를 뽑고, 길다란 괭이로 텃밭의 흙을 고르고 작은 돌맹이를 골라내는 일 하나로도 휠체어를 탄 내겐 땀으로 옷을 적시기 충분하였습니다.

  갑자기 예고 없던 친구들이 집으로 놀러 오겠다는 전화에, 상의까지 벗어 던지고 일하던 몸을 일으켜 현관 계단을 기어올라 집안으로 들어갔습니다.

  흠뻑 젖은 땀을 서둘러 씻어 낼 즈음에 예닐곱명이 회장니~하며 평소 잘 따르던 회원들이 집안으로 들어섰습니다.

  나는 휠체어를 타고 생활하는 1급 장애인으로서 활동 보조인의 도움이 없으면 이동이 쉽지 않았기 때문에 비교적 활동이 자유로운 장애인들이 집으로 찾아오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 날도 평소와 다름없이 한 무리 회원들이 예고 없이 방문한 것입니다.

  친구들과 한나절을 따사로운 앞마당 잔디밭에 앉아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하지만 쉬지 않고 재잘대는 친구들 사이에 말 수도 적고 수줍음 많던 낮선 그녀 모습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습니다.

  직장선배 언니들이 입버릇처럼 이야기 하던 그들의 회장인 내가 궁금하여 따라 온 다소곳한 21살의 그녀는 5월의 태양보다 밝고, 붉은 장미보다 더 아름다웠습니다.

 

  “장애인은 스스로 할 수 없다?”는 생각이 고정관념화 되어버린 사회적 편견을 바로잡기 위하여, 그 당시 나는 국토종단대행진이라는 프로젝트를 구상하여,

  서울-부산 간의 국도 약500km를 휠체어를 타고 맨손으로 달려 10일 만에 완주하였고,

  제주도를 거쳐 목포에서 서울에 이르는 740km 국토종단을 14일 만에 완주하였으며,

  서해안과 남해안 그리고 동해안을 거처 강원도 한계령을 넘어 임진각에 이르는 마지막 3차 국토해안선 2.000km를 완주 하려는 야심찬 계획을 3년 동안 준비하고 있을 무렵이었습니다.

  장애인이 모이는 곳에는 항상 봉사의 손길이 필요했고, 그녀는 자연스럽게 행사에 늘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 해 8-

  한국과 일본대학생 1.200명이 모여 한라산을 오르는 .일 대학인 우정의 캠프에 나는 장애인대표로 초청되어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15일간 일정으로 함께 야영생활을 하게 될 이 행사에 그녀가 나를 위하여 봉사를 자원했습니다.

  행여 씻지 못해 불편할세라 새벽 같이 일어나 씻겨 주었던 그녀...

  8월의 한여름, 주체 없이 흐르는 땀을 닦아주며 격려하던 그녀...

  들이치는 빗물이 스며들세라 수로를 파고 빗물이 넘칠세라 텐트 주변에서 밤을 새웠던 그녀...

  휠체어를 타고 516도로를 통해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1100고지 도로를 넘도록 그녀는 나의 그림자 되었습니다. 그녀의 격려 덕분으로 일정을 완벽하게 이루는 쾌거를 만들어 내었습니다.

  그러나 나를 두고 한라산 정상에 오르는 것은 무의미하다며 그녀와 함께한 친구들에게 강제로 이끌리어 기어서, 업혀서, 의자에 태워서 12시간의 사투 끝에 1급 장애인으로서는 국내 최초로 한라산 정상에 올라 백록담의 물을 마시던 벅찬 그 감동의 순간들...

  이 밤 다시 내 가슴을 뜨겁게 합니다.

 

  1987년 개천절 아침- 몇 년을 준비해왔던 마지막 3차 국토종단 첫 시작이 여의도 광장을 출발하여,

  인천을 거쳐 서해안을 따라 목포에서 제주도 해안을 돌아

  다시 목포로 나와 남해안을 거쳐

  동해안을 따라 속초에서 한계령을 넘어 인제, 원통을 거쳐 임진각에 이르는

  장장2.000km37일간 완주하는 동안 어려운 고비 때 마다 직장을 팽겨치고,

  그녀는 격려의 응원을 잊지 않았고,  

  추석날 귀향길을 포기하고 10시간 이상 버스를 타고 숙소로 찾아와 힘을 실어주던 그녀...  

  그래서 더욱 잊을 수 없는 그 날의 그 순간들...

  진눈개비를 맞으며 함께 한계령을 오르며 눈물어린 구호로 격려를 하던 그녀가 있었기에 한계령을 넘을 수 있었으며,

  1987119일!

  드디어 37일간의 일정으로 무려 2.000km를 완주할 수 있었습니다.

  이 행사를 통해 모든 이가 불가능하다고 여긴,

  그리고 장애인은 할 수 없다는 부정적인 그릇된 관념을 일깨우고,

  작게는 나의 목적을 3년 만에 이루는 순간이었지만,

  이 땅의 모든 장애인에게 할 수 있다는 긍정적 사고로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으로 산다면,

  인간은 장애가 있을지라도 잔존의 능력으로도 무한한 도전에 성공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사례였다고 생각합니다.

 

  가을바람에 낙엽이 흩어져 날리던 날-

  내 나이 서른하나에 9년이나 어린 스물 두 살의 꽃 같은 그녀에게 멋쩍은 청혼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옛말에 선도 보지 않고 데려간다는 칠남매 중의 셋째 딸이었던 그녀.

  그녀의 부모에게 결혼을 허락 받는 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나는 명예와 모든 것을 버리고 아무도 모르는 충청도의 작은 도시에 둥지를 틀고 남매를 낳고 열심히 살았습니다.

  아내를 위해서 부끄럼 없이 개미처럼 열심히 살았습니다.

  남편을 위해서 힘들다 한마다 없이 살았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위해 열심히 살았습니다.

  휠체어를 타고 한여름 밀짚모자 하나의 그늘로 저수지에서 낚시도구를 파는 노점도 했습니다...

  휠체어를 타고 한겨울 볼이 얼어 부풀어 오르도록 붕어빵도 구어 팔았습니다...

  떳떳한 아빠 엄마가 되기 위하여 당당하게 살았습니다.

  그녀는 새벽바람을 가르며 작은 스쿠터에 우유를 가득 싣고 배달을 하였습니다...

  눈길에서 넘어져 쏟아진 우유가 남에 눈에 띌새라 아픈 줄도 모르게 재빨리 주워 담았습니다...

  빗길에서 넘어져 쏟아진 우유가 남의 눈에 띌새라 골병드는 줄도 모르고 재빨리 주워 담았습니다...

 

  14평 작은 아파트를 입주하던 날!

  기쁨으로 감격해서 화장실에서 그녀 모르게 소리 없이 울었습니다.

  형제들의 도움으로 작은 비디오가게와 레코드와 카세트 판매점을 차렸습니다.

  개미 같이 일한 덕분에 제법 규모가 늘어나 어엿한 전문점으로 성장하였습니다.

  그러나 IMF차관 도입사태로 국가가 재정난을 겪게 될 즈음 호황을 누리던 비디오대여점이 경제 불황으로 파산하게 되었습니다.

  갈 곳이 없었습니다.

  서울을 떠난 10년 만에 빈 몸으로 서울로 다시 올라와 또다시 개미같이 일을 시작했습니다.

  불행은 겹쳐 온다는 말처럼 강직성척추염척추협착증으로 극심한 허리 통증으로 나는 사경을 헤메였으며,

  두 번의 척추수술로 거의 하반신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경제능력을 잃은 지금-

  내 삶의 고통까지 짊어지고 가야하는 그녀를 바라보면 볼수록 가슴을 애이도록 나를 아프게 합니다.

  2년여 동안의 병마를 딛고 또다시 재기하여.

  마지막 남은 잔존의 능력으로 장애인고충상담가로, 문화복지사로 그 역할을 다하고 있을 무렵.

  100kg의 거구를 안아서 매일 휠체어에 싣고 내리던 아내가 허리의 심한 통증을 호소하더니,

  감기조차 마음대로 앓지 않던 그녀가 일어서지 못하였습니다.

  “추간판돌출증...” 소위 말하는 척추디스크가 파열된 것입니다.

  당연한 결과가 온 것입니다.

  작은 체격의 그녀가 100kg의 거구를 안아 매일 들어 올려 휠체어에 태웠으니...

 

  아내라는 이름만 생각해도 가슴이 저려오는 이 아픔...

  평생 친구가 되어 달라는 내 프러포즈에 자신을 버린 채 25년을 하루같이 한 사람만의 봉사를 자원한 그녀!

  운명처럼 만난 그녀가 이젠 삶에 지쳐 내 팔을 베고 곤히 잠들어 있습니다.

  잠시 후, 날이 밝으면

  그녀가 손수 다려 날이 선 깔끔한 드레스셔츠를 입고 골라 준 넥타이를 매고 세상 속으로 나가는 나를, 

  밤새 끙끙대며 앓던 그녀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 처럼 밝은 미소로 배웅할 것입니다.

 

  2010420일 장애인의 날-

  “올 해의 장애인상으로 대통령상을 수상하던 날.

  화려한 시상식장에서 그녀는 내게 속삭였습니다.

  “난 당신만 바라보면 힘이나...”

 

 

  오늘 아침-

  그녀의 지갑에 한 통의 감사 편지를 써 놓고 출근하리라 마음 먹어봅니다.

 

 

 

 

   2012. 3. 26. 새벽에.

 

나의 40대- 충주 중앙탑 조정지 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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