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아가는 이유

한국장애인문화협회 상담소장 최부암

서울의푸른하늘 2010. 2. 26. 10:29

신앙이 있었기에 장애도 시련도 극복…

 

한국장애인문화협회 최부암 상담소장    [국민일보] 2006-04-19 15:19

    한국장애인문화협회 최부암(50) 상임부회장 겸 상담소장은 어릴적 소아마비와 척추장애를 앓고 일찌감치 하반신이 마비됐다. 유복하고 화목한 가정에 태어난 덕에 어려서는 자신이 장애우란 사실을 느끼지 못했다. 스무살 중반 세상에서 소외된 수많은 장애우들을 봤고, 그제서야 장애우를 바라보는 세상의 왜곡된 시선을 깨달았다. 편견을 깨기 위해 휠체어로 국토를 횡단했다. 그러나 찬사와 성공의 순간도 잠시. 번창하던 사업은 파산했고 아내에게는 병마가, 아이에게는 장애가 찾아왔다. 남들은 “파란만장하다”고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시험일 뿐”이라고 담담히 받아들인다.

 

   최 소장은 요즘도 19년 전의 기억이 생생하다. 최 소장은 1987년 서울 여의도를 출발, 서해와 남해 그리고 동해를 돌아 33일 만에 임진각에 닿았다. 장장 2000㎞ 였다. 1차, 85년과 2차, 86년 서울-부산 640㎞,서울-제주 720㎞를 완주한데 이은국토종단의 완결이었다. 휠체어를 타고 해안선을 따라 맨손으로 한반도를 달린 젊은 날의 패기와 오기들. 그랬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했던 국토종단은 정말로 패기였고 오기였다.

 

  그가 국토종단을 결심한 것은 84년의 어느 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울 토박이로 태어난 그는 수산업을 하시던 아버지덕에 ‘신발에 흙 한번 묻히지 않고’ 자랄 수 있었다. 생계걱정이 없었기에 초등학교만 졸업, 학교를 그만뒀다. 글쓰기에 심취했기 때문이었다. 그때부터 스무살이 넘도록 여기저기 잡지에 기고를 했다. 용돈벌이 수준이었지만 별 상관없었다.

 

  글쓰기가 한계에 부딪칠 때쯤 선배의 권유로 KBS 라디오에 신설된 장애인 프로그램에서 일을 하게 됐다. 어느 날 프로그램 팬클럽 회원들을 위한 단체 미팅에 나갔다. 약속된 장소에는 100명 가까운 장애인들이 모였다. 충격이었다. 그제서야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세상에는 ‘병신’,‘불구’라 불리며 소외받는 장애인들이 가득했다.

 

  그길로 ‘푸른하늘가족모임’(한국장애인문화협회 전신)에서 장애인들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는 일을 시작했다. 국토종단은 그 일중 하나였다. 제1차 국토종단 때는 후원금이 없어 쩔쩔 매었지만 1차가 성공하자 사회적반향이 일었다. 장애인를 대표해서 무언가 해냈다는 기쁨도 잠시. 시련이 밀려왔다. 통일교 관련 기업에서 후원금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무신론자였던 그에게 통일교는 잘 모르는 이야기였다. 장애인 사역의 특성상 교회들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그였기에 문제가 심각했다.

 

  결국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아내 김순옥(41)씨와 함께 낯선 충주로 내려갔다. 충주에서는 장애인 단체 일보다 자신과 가족을 우선으로 생각했다. 자신은 비디오가게를 시작했고 아내는 문구점을 열어 열심히 벌었다. 아파트도 장만했다.

 

  그런데 불행이 다시 찾아왔다. IMF경제 위기가 닥쳤고 사업은 망했다. 10년 벌어 모은 집 등 모든 것이 거품처럼 사라졌다. 노점상을 하며 생계를 꾸려야 했고 분노와 원망이 가득했다. 그러던중 주변의 권유도 있고 해서 신앙을 통해 자신의 어지러운 마음을 비우고 삶을 새롭게 한다는 생각에 교회에 나갔다.

 

  다행히 이런 이기적인 생각들은 지금와서는 변했다. 최 소장은 “신앙이 있었기에 좌절해도 절망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다”며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교회에 가는 것이 가장 즐겁다”고 말하며 웃었다. 그는 서울 등촌동 영광교회(김창배 목사)에 출석하고 있다.

 

  마음이 안정되면서 장애우 단체에서의 그동안 활동도 되돌아보게 됐다. 그는 23년간 장애인문화협회에서 활동했다. 맏딸과 아들의 이름은 협회의 전신인 ‘푸른하늘가족모임’을 의미하는 하늘이(17)와 청록이(8)로 지었다. 상담소를 통해 장애인들이 결혼과 직업 등에 관해 고민하는 것을 함께 나누었고, 이 과정에서 400여 쌍의 결혼을 도왔다. 장애인문화협회를 통해 문화제 연극제 음악제 등을 개최하며 장애인와 비장애인의 벽을 허물고 있다. 그는 “그동안 장애인들을 위해 상담하고 활동했던 것들이 나를 위해서 일한 것은 아니었는지 깊이 반성하고 있다”며 “이제는 내가 아닌 다른 장애인들을 위해 무언가 길을 찾아 가고 싶다”고 말했다.

 

  물론 최 소장에게 이제 걱정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상황이 더 악화됐다. 아내에게는 병마가, 아이에게는 뜻하지 않은 장애가 찾아왔기 때문이다. 장애 없이 건강했던 순옥씨는 최근 척추수술을 받았다. 둘째 창록이는 ‘무혈성대퇴골두괴사증’이란 희귀병 판정을 받았다. 창록이는 수술을 했지만 한쪽 다리를 전다. 그는 “아내가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고생한 탓이라 생각하니 한없이 미안하다”며 “이 땅에서 장애인로 살아간다는 고통을 알기에 아이에게 장애가 대물림된다는 것은 솔직히 고통스럽다”고 털어놨다.

 

  그러나 비관하거나 낙담하지는 않는다. 최 소장은 “하나님께서 저에게 건강한 신체를 주셨다면 제가 장애인들을 위한 이 같은 귀한 일들을 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분명 하나님께서 창록이게 시키실 일들이 있을 것이고, 창록이 역시 어려움을 극복해 나갈 것”이라고 확신했다.

 

  최 소장은 기회가 되면 젊은 시절의 꿈을 되살려 아내와 장애인들을 위한 글을 쓰고 싶다. 그러나 건강이 문제다. 그는 2000년과 2003년 척추협착증으로 수술을 했고, 앞으로 언제 휠체어를 버리고 침대생활을 하게 될지 알 수 없다. 그는 “이제 쉰살이 넘으니 내 고집이 아닌 남을 위해 베풀 수 있는 마음과 세상을 보는 눈이 생긴 것 같다”며 “하나님께서 건강을 허락하시는 그날까지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담담히 말했다.

 

엄기영 기자 eom@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