휠체어국토종단대행진 기록일지
전국토해안선 2000km일주
휠체어국토종단대행진
『이 행사가 끝을 맺고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진지, 이미 22년 전의 이야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내겐 끝나지 않은 일입니다. 장애인이 살기 좋은 세상, 그리고 장애인이 편한 세상이 실현되는 날까지 나의 노력은 계속 될 것입니다.
휠체어국토종단대행진은 1985년 부산에서 서울까지 540여km 완주를 첫 시작으로 하여, 2차로 1986년 제주에서 서울까지 720여km 완주를 하였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3차 국토종단은 1987년 전국토해안선을 따라 2000여km를 완주하였습니다.
22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맨손으로 휠체어의 두 바퀴를 달려 온 주자들의 뜻을 조금이나마 위안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처음부터 1, 2, 3차를 기획하고, 달리고, 총 지휘자가 되어야 했던 내가, 이 행사의 일지를 정리하여 22년 만에 여기에 옮깁니다.』
행사준비위원장; 최 부 암
2009. 12.
1987년 10월 3일~1987년 11월 8일 까지 (37일간의 기록)
손으로 달린 사람들
장애인의 신념과 의지를 표출하는 모습이 여기저기에서 메아리치고 있지만, 지난날은 한낮 소리 없는 함성이 되었기에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는 구호가 부정적일 수밖에 없었음은 사회 속에 장애인의 인식이 생활권 밖에 묻혀 있었던 까닭입니다.
진정코 우리의 뜻을 모든 이들에게 확인시키기 위하여, 국내 최초의 국토종단을 결행하게 되었던 지난 1985年 9月 29日. 부산에서 서울에 이르는 540km.(그 때에 코스를 선정한 국도의 거리) 구간을 10日만에 완주하여, 서울에 도착하였을 때에 주자였던 최부암, 천대철, 공헌구 삼총사는 벅찬 가슴으로 ‘해내었다’는 감격으로 애써 눈물을 감추어야 했습니다. 장애인이기에 어느 누구에게도 나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아야 한다는 자존심 때문이었습니다.
굳은살은 물집으로 터지고, 터진 물집 속으로 생살이 삐져나와 살을 도려내는 듯한 고통을 감수하며 맨 손으로 달려왔던 순간들......
村老가 꼬깃꼬깃한 천 원짜리 지폐를 꺼내 손에 쥐어 주며, ‘열심히 혀서 1등 하라고...내 새끼도 병신이여.’ 주름 깊이 패인 눈가에 가득 고인 눈물을 뒤돌아 감추고 계셨습니다.
장애인을 자식으로 둔 부모의 절규에, 손가락 마디마디에 힘을 모아서 열심히 휠체어 링을 돌려야 했습니다.
남편이 장애인이라며 훌륭한 당신들의 모습을 보니 ‘삶의 용기가 솟는다’는 젊은 부인의 밝은 미소가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1985年 10月9日- 여의도의 도착 장소엔 공휴일이라 인파가 대단히 붐비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인파 중에 행색이 초라한 부부는 갓난아기를 안고 있었습니다. 그 아기는 태어날 때부터 실명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 부부가 나의 눈에 뜨인 것은 그 때였습니다. 느닷없이 내 손을 잡고 울먹이며, ‘당신들은 미래에 이 어린아이의 꿈과 희망이 될 것’ 이며, ‘지금 아이가 성장 할 무렵이면 우리나라의 복지 제도는 기대와 확신을 할 수 있겠지요.
그 날이 오면, 당신들의 기억을 결코 잊지 않겠어요.’하며 헤어짐을 몹시 아쉬워하던 그 여인의 한 마디가 아직도 내 가슴에 깊이 남아 있습니다.
제2차 국토종단 대행진을 나는 다시 세워 제주에서 서울에 이르는 720km(그 때에 코스를 선정한 국도의 거리) 의 거리를 확정하여, 코스의 면밀한 현지답사 후 1986年 3月18日부터 4月6日까지 20日間의 일정으로 천대철, 오충학, 최부암, 세 주자는 또 다시 험난한 일정을 무사히 마쳤습니다. 장애인이기에 도전하였고, 건강인도 쉽지 않은 거리였기에 더욱 의미가 있었던 국토 종단!
작게는 내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자였고, 크게는 100만 장애인에게 용기를 심어 주고, 더 나아가서는 사회의 부정적 관념을 일깨웠고, 장애인에게 하면된다 희망과 기대를 안겨준 휠체어국토종단대행진...
...빗길을, 언덕을, 산길을, 비포장 도로를 달려왔습니다.
인간의 무한한 도전정신과 능력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라고, 마음속으로 외치며...
이제 장애인이라는 단어가 우리 사회에서 낯설지 않음은, 그동안 적지 않은 장애인들이 각계각층에서 활동하는 까닭이며, 정책적으로 배려가 싹트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제3차『휠체어 국토종단 2000km 대행진』계획을 세우게 된 배경도 1차와 2차에 이은 사회적 관심과, 인간의 능력은 장애가 있건 없건 무한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시키기 위함입니다.
지난 1987年 8月6日 나는 전국의 대학생 1200명과 일본의 대학생 300명 등, 약 1500명의 젊은 지식인들과 10일간의 일정으로 “한․일 대학인 우정의 캠프”에 장애인 대표로 초대되어 선후배 장애인 4명과 함께 이 행사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1500명과 함께 야영하고 함께 휠체어로 행군하고.... 드디어 한라산 등정의 일정이 시작되어 나는 그들과 함께 1500m까지 휠체어로 오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은 오를 수 없다는 것을 같은 일행인 김영수씨의(그 당시 대학생. 3차 국토종단 때에 총무 일을 수행함) 강행으로 한라산등정 보조 팀을 즉석에서 구성하여 12시간의 사투 끝에 백록담까지 오르는 대 역사를 이루어 내고야 말았습니다. 홀로는 불가능할지라도 함께 하는 노력에는 불가능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현실로 나타난 결정체였습니다.
나는 오르다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신념으로, 장애의 한계성을 넘는 결과를 낳게 되었고, 내 자신에게는 진정코 비장애인들과 어깨를 같이 할 수 있었음에, 웅장한 한라산 정상에서 백록담을 바라보며 감격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장애인의 어려움을 피부로 인식하고 생사를 같이 하면서, 스스럼없이 우정의 끈으로 연결된 1500명의 대학인들은 나를 포함한 4인의 장애인(안인수, 천미경, 김미영)을 통하여,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었다고 오히려 감사의 뜻을 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이 기회를 빌려 진실로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3차 국토종단은 한․일 대학인 우정의 캠프를 주최했던 남북통일국민연합의 주선으로 3차 국토종단의 후원자를 찾는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주)일화에서는 상업적 차원을 떠난 순수 사회복지운동의 일환으로 행사경비 일체를 부담하겠다고 나섰습니다.
1987年 9月 6日부터 세부계획에 착수하였고, 일주일간의 코-스 답사와 도로사정, 정체구간조사, 공사구간조사, 구간별 거리측정, 커브각도, 오르막길, 내리막길의 경사도 측정, 숙소와, 행사장 사전답사 등, 치밀한 준비로 1차와 2차의 미비점을 보완하여 완벽한 장비 구입과 비상계획 수립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협찬회사와 후원기관이 특정 종교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 하나로 무수한 제재와 방해를 받았음을 이 자리를 빌려 토로합니다. 000방송국은 특집으로 다루어 전 과정을 독점 녹화 방영하겠다고 나섰던 P․D가 갑자기 난색을 표명하고 자리를 피해 버리는가 하면, △△신문사 역시 공동 협찬으로 신문에 전 과정을 연재를 하겠다고, 타 신문사에 자료제공을 보류 해달라는 요청까지 해왔습니다. 그러나 출발 직전 갑자기 태도를 바꾸는 바람에 언론계와 방송계의 홍보 계획은 어이없게도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장애인의 능력을 사회에 알리고 이들의 삶의 목표를 의미 있게 부여하는 이 행사가 어찌 종교와 이념의 견해가 있어야 하는지......
더욱이 이 행사는 1988年 장애자올림픽의 의미를 올바로 알리며, 그 필요성을 인식시키고 나아가서는, 분단 된 내 겨레와 민족의 통일을 향한 원대한 뜻이 함축되어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더욱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본 행사의 취지인 「주자가 올리는 글」의 전문을 여기에 옮깁니다.
『전 세계의 이목과 관심이 집중되는 하계올림픽이 내년 9월에 우리나라에서 개최됨과 동시에 장애인들의 꿈의 제전이요,
신체의 결함을 극복하고 잔존능력의 기량을 발휘해 인간의 능력 한계를 초월해 신화를 창조해 내려는 장애자올림픽이 내년 하계올림픽이 끝난 직후인 10월에 개최된다는 사실을 아는 이가 많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온 국민이 참여하고 성원해야 할 장애자올림픽(PARALYM-PICS)을 널리 홍보하고자 전 국토 2000km를 휠체어로 달리게 됩니다.
분단 된 국토, 분단 된 민족, 분단 된 주권, 분단 된 언어로 43年間을 지내왔습니다.
이 조국이 다름 아닌 장애자임을 벅찬 가슴으로 느낍니다.
우리의 행진이 전국의 마을 구석구석 까지 민족의 아픔이요 숙원인, 남북통일의 함성이 되고자 합니다.
또한 우리민족 내부에 깊이 스며있는 분열을 조장하는 모든 요인을 걷어내고,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향한 힘찬 레이스를 펼칠 것입니다.
특히 이 행사를 통하여 장애자의 능력과 집념이 얼마나 강하고, 장애자 역시 한 인간의 개체로서 동등한 것임을 재확인하여, 사회의 그릇된 편견을 개선하고자 합니다.
저희는 지난 ‘85년 9월 29일부터 10월9일 까지 제1차 국토종단(부산에서 서울에 이르는) 640km를, 또한 ’86년 3월18일부터 4월 6일 까지 제2차 국토종단(제주-서울에 이르는)720km를 휠체어로 완주하여, 국내에 100만 이상의 장애인들에게는 꿈과 용기를 심고, 4000만 국민에게는 장애인의 굳센 정신력과 집념을 실천하였습니다.
이번 종단을 통하여 장애자올림픽을 온 국민의 성원과 기대 속에 성공리에 마칠 수 있도록 하며,
분단 된 조국 통일의 염원을 가슴에 안고 우리 모두가 하나로 뭉쳐 화합하는 계기로 삼고 싶습니다.
끝으로, 이 아름다운 행사를 위해 후원해 주신 남북통일국민연합과, 한국장애자재활협회와 협찬을 해주신 주식회사 일화에 심심한 감사를 드립니다.
1987. 9. 9.
주자대표: 천대철 올림
출발전야
주자 천대철과 준비위원 7명은 여의도 출발 장소에 가장 가까운 곳으로 숙소를 정하고 내일 출발에 대한 점검과 세부준비를 체크하였습니다. 나와 총무인 김영수씨는 34개 경유지역의 인력동원 점검 및 14개 지역에서의 공식 행사를 갖기 위한 준비에 머리를 짜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일 출발식에 따른 일정이 만족하게 이루어질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초 출발 예정은 10月1日 여의도를 빠져나갈 계획이었으나, 국군의 날 행사와 퍼레이드(시가행진)로 여의도 일대가 교통통제 되어 있었기에, 부득이 3日을 늦춰 내일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내일도 여의도 광장은 종교 단체에서 대규모의 집회를 갖게 되어 있다고 치안본부 관계자는 일정을 늦추어 출발하라고 수 차례 나에게 설득하였으나, 더 이상 날짜를 연기 할 수 없음이, 전국 시, 도 사회국과 기관, 단체에 공문을 발송하였기 때문에 일정을 수정하기가 불가능하고, 행사준비에 너무나 큰 차질이 생기므로 강행해야 했습니다.
1987. 10. 3.
서울-인천 (35km)
새벽 4시부터 일어나 KBS 본관이 바라보이는 광장에 아치와 프랭카드를 설치하느라고 준비위원들은 땀으로 온통 젖어 있었습니다.
종교집회가 오전 11시부터 진행된다고 하였기에, 최소한 우리 팀은 그 시각 이전에 출발식을 마치고 2000km 대장정에 올라야 했기에 새벽부터 서두르지 않으면 않되었습니다.
첫 일정은 서울-인천 구간 35km의 짧은 거리였지만, 주자의 컨디션이 썩 좋지 않아 염려가 되었습니다.(대철이는 그 때 장염으로 체력이 퍽 탈진해 있었습니다.)
오전 9시 40분- 남북통일국민연합 부의장인 김은우 박사의 축사와 한국장애자재활협회 문병기 회장의 격려사를 깊이 새겨 가슴에 담았습니다.
나는 전 구간의 일정과 개요, 목적을 설명하고 드디어 대장정의 국토종단이 시작되었습니다.
한국장애자재활협회 임직원과 회원 그리고 푸른하늘가족모임회원 등 500여명과 우정의 행진이 시작되면서 남북통일국민연합 소속의 대학생 100여명이 ‘통일은 우리의 힘으로’, ‘천대철 2000km 국토종단’ 등의 각종 피켓과 프랭카드를 들고서 장애인과 함께 어우러져 휠체어를 밀고 여의도에서 영등포역까지 우정의 행진을 하였습니다.
영등포역을 빠져나온 주자 천대철과 보조 주자 조수남 그리고 맛사지사 서금동군은(자전거로 보조하며) 시속20km 이상의 빠른 속도를 내기 시작하였습니다.
주자들은 우정의 행진팀에 환송을 받으며 힘차게 달려, 벌써 인천을 향한 국도 끝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KBS-TV와 MBC-TV는 출발 취재와 함께 인파 속에 묻힌 대행진팀을 멀어질 때까지 카메라에 그림을 담고 있었습니다.
문래동, 유한공대 앞, 역곡, 부천을 거쳐 인천 시청까지의 소요시간은 2시간 47분이 걸렸고, 인천 도착 행사는 오후 3시 30분에 마치고 예정된 숙소에 첫 여장을 풀었습니다.
만발한 코스모스와 눈조차 시린 가을 하늘은 드높고 맑았습니다.
김영수 총무는 일지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지난 여름 한라산에서 느꼈던 통일의 의지가 되살아납니다. 80kg의 거구 최부암, 안인수 형님과 2명의 언니를업고 올랐던 그 정열이 이젠 이 민족 구석구석 까지 울려 함성이 되어야 합니다...
...연도에서 자립원생과 원장님의 격려는 새로운 힘이 솟으며, 긴 여정의 힘의 원천이 되기에 다시 감사함을 느낍니다....」
1987. 10. 4.
인천-수원 (45km)
두 번째 구간인 인천을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일요일 오전 시간이라서 출발은 너무도 조촐하였고, 인천 시청 광장을 사용하려 했지만, 일요일이라 시청 정문을 열어 줄 수 없다는 관계자의 비협조로 시청 입구에서 남북통일국민연합의 직원 20여명의 환송을 받으며, 일정보다 20분이 늦은 9시20분에 출발을 하여 총45km 구간의 레이스에 들어갔습니다.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경․수산업 도로는 차량 통행이 너무나 많아, 경찰 에스코트 차량과 선두 차량과 후미 차량은 주자에게 끼어 드는 차량을 막느라 진땀을 흘렸고, 나는 다음날의 행사와 주자의 건강에만 신경이 쏠려 있었습니다.
오로지 행사를 기원하는 염려만 가득 담아 일지를 메웠습니다.
...검은 매연에 얼굴과 눈만 반짝이는 대철과 수남은 땀과 먼지로 범벅된 모습이 마치 지난 1~2차 국토종단의 주자로 달리던 나의 모습으로 착각하는 순간순간이었습니다.
도로 가장자리에 만발한 코스모스는 청초하기 짝이 없는 한 무리 장애자였습니다. 매연과 흙먼지로 형태조차 알 수 없게 되어버린 줄기에 검은 흙덩이가 범벅되어 있었어도 꽃의 본연을 잃지 않고, 각양각색으로 무리를 지어 피어있는 모습은, 저기 달려오는 주자의 티 없이 밝은 미소요, 구김 없는 표정이며, 본연의 기능을 잃어버린 하반신이거늘......
오후 4시 45분 수원 시청에 도착하자 시장, 보사국장, 지역 기관장, 남북통일국민연합 수원지부위원장 등을 비롯한 환영객 100여명의 뜨거운 환영을 받았습니다.
「...정상인이라도 어려워 엄두도 못 낼 일을 휠체어에 몸을 싣고 국토를 순례하는 여러분이야말로 의지의 한국인이요, 43년 간 허리를 잘려 성장한 이 강토가 장애인의 모습이요, 어찌 남북통일을 위함이 100만 장애인의 일이겠습니까? 여러분의 집념에 고개가 숙여 집니다...」
수원시장과 남북통일국민연합 수원지부위원장의 격려사는 계속 되었습니다.
일지를 정리하고 눈을 뜨니 날이 밝아오고 있었습니다.
1987.10. 5.
수원-천안 (62km)
맑고 드높은 가을하늘, 넓게 트인 도로, 깨끗한 거리, 그것이 수원의 아침이었습니다.
유석보 수원시장과 더불어 400여 시청공무원의 뜨거운 환송이 연도에 까지 이어졌고, 출근하던 시민들의 격려의 박수가 지금도 귓전에 들리는 듯합니다.
수원을 지나 천안에 이르는 62km 구간의 들녘은 황금물결이 끝이 없었고, 이 행사를 무사히 마치도록 기원이나 하는 듯, 한가로이 풀을 뜯던 송아지가 큰 소리로 노래하고 있었습니다.
1~2차 국토종단 때에 달려왔던 길이었기에 낯설지 않았습니다.
“형! (주자가 필자를 부르는 호칭) 저 곳 생각납니까? 2년 전 제1차 종단 때 우리가 밥을 얻어먹던 곳......”
지휘차량으로 바짝 다가와 천진스런 표정으로 대철이가 말했습니다.
들녘에 누렇게 익은 벼를 베던 농부가 한사코 붙잡아 밥을 같이 먹자던 그 들판...
논두렁에 앉아, 커다란 주발 밥에 열무김치 우적우적 씹어 먹던 그 들판...
손바닥에 잡힌 물집 때문에 수저조차 들어올리기 고통스러웠던 그 날의 기억들......
작은 마을 구석구석 까지 장애인의 무한한 가능성을 알리던 그 날들...
지금 다시 이 길을 남북통일 기원과, 장애자올림픽을 성공리에 마칠 수 있도록 국민에게 홍보하고, 전국의 장애인에게 꿈과 용기를 심기 위하여, 구슬 같은 땀을 흘리며 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오후 5시 정각- 예정 시간에 정확히 천안 시청에 도착하여 시장의 따뜻한 격려와 금일봉을 받았습니다.
강직하면서도 신념이 강한듯한 첫인상의 김중배 시장은 퍽이나 대하기 마음 편한 분이었습니다.
시청직원 80여명과 20여명의 지역 장애인단체장. 그리고 수많은 시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지정 된 숙소에 도착하였습니다.
1987.10. 6.
천안-대전(76km)
천안시장, 사회과장, 시청직원 100여명의 환송을 받으며, 오전9시 정각에 천안 시청을 출발하여 대전을 향한 76km 구간의 레이스가 시작되었습니다.
구간별 거리가 점점 길어짐에 따라 무엇보다도 주자의 체력안배에 신경을 써야 했습니다. 손에 상처는 없는지, 물집의 상태가 심하지 않은지, 근육의 통증은 심하지 않은지, 주자에 관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면밀히 신경 쓰지 않으면, 아직도 한 달여 동안 달려야할 행사에 커다란 차질을 가져 올 수 있기에, 진행원 각자는 조금도 다른 생각할 여유가 없습니다.
서울 출발부터 계획에 없던 보조주자 수남은 대철의 뒤를 쉬지 않고 쫓았습니다.
조수남은 대철이와 함께 한국소아마비협회인 정립회관에 소속된 육상 선수입니다. 대철이가 전 국토를 달리는 동안 자신의 체력이 떨어질 때까지만 이라도 같이 달릴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을 하여, 일정에 없는 보조주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훈련으로 단련된 대철이의 체력과 기량엔 따라 올 수 없어, 수남은 계속 1~2km 이상의 거리가 나게되자 선두와 후미를 통제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습니다. 거리를 맞추기 위해 대철은 달리다가 멈춰 함께 달리기를 수없이 반복하였으며, 수남이는 장거리를 달려본 경험이 없기에 신체에 무리가 올까봐 주자보다 더욱 관심을 갖지 않으면 않되었습니다.
사이클을 타고 주자 뒤를 바짝 붙어 물의 공급과 시중을 드는 보조원 서금동은 전문 스포츠 맛사지사입니다. 근육 맛사지를 통하여, 뭉친 근육의 이완을 도와주고 통증 부위를 지압으로 멎게 하며, 긴장을 풀어주는 중요한 일을 맡고 있습니다. 주자들의 그림자 되어 한 방을 사용하는 것은 물론이고 식사도 함께 하며, 심지어는 화장실 출입까지 함께 하면서, 주자들의 모든 생활을 세심하게 살피는 친구입니다.
국군대전 병원을 지나, 천안 출발 지점으로부터 43km 지점에 이르는 오르막 급커브 길에 도착했을 때, 체력이 떨어질 까봐 두 주자에게 상당히 신경이 쓰였습니다. 급경사 커브길이였기에, 지휘 차량은 주자들의 뒤에 바짝 붙어, 전방 도로 사정을 마이크로 지시해 주고 다가오는 차량의 통제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장난기가 발동한 대철은, 내가 탄 지휘 차량 옆으로 붙어, ‘형도 달리고 싶지. 나랑 내려서 시합하자...’
경상도 특유의 사투리로 쉬지 않고 떠들어대면서 달리는 모습......
과연 저 체력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손으로 달리는 저들에게 신이 내린 선물일까? 아니면 신체장애에서 오는 남다른 투지일까? 어쩌면 저 장애를 극복하려는 습관이 저렇게 강하게 자신을 만들었을까......
“형. 내가 작년에 이 고갯길에서 릭․핸슨을 녹다운 시켰던 곳이야.”
두 손을 위로 번쩍 치켜드는 대철이가 너무도 믿음직해 보였습니다.
전 세계 40개국을 휠체어로 순방중인 장애자 육상선수인 캐나다 출신의 릭․핸슨이 우리나라를 방문하여 부산에서 임진각까지 달렸던 일이 떠올랐습니다. 그는 신체적 조건이나 장비들이 우리에 비하여 월등 우수하였지만,(그가 탄 경기용 휠체어가 800만원임) 대철의 승부욕과 패기에는 따를 수 없었습니다.
만약에 우리나라 선수에게 저토록 훌륭한 장비와 운동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체육시설이 배려만 된다면 얼마든지 훌륭한 선수가 육성될 수 있으며, 선수 발굴 또한 무한할 것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천안시청을 출발해 옥천휴게소, 백제휴게소, 전의, 갈거리, 조치원 고대분교, 육군항공학교, 국군대전병원 앞을 거쳐 대전 시민회관에 도착하였습니다. 특히 대전의 휠체어 농구팀들과 약 3km구간을 우정의 레이스로 함께 하여, 연도의 많은 시민들에게 뜨거운 환영을 받았습니다.
1987.10. 7.
대전-논산(42km)
추석날 아침입니다.
상가와 식당가는 모두 문을 닫았습니다. 성묘 길을 떠났는지 도시는 허허롭기만 합니다.
어젯밤 특별히 식당에 부탁하여 겨우 아침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주자와 모든 진행원은 식사시간에 잠시 고향을 향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오전 9시. 아직은 한산한 도로를 빠져나온 우리 일행은, 점점 외곽 도로에서 성묘를 향한 길을 메운 각종 차량이 주자에게 끼어드는 어려움에 정신을 가다듬을 수 없었습니다. 대전 경찰서에 부탁해 놓은 에스코트도 어찌된 영문인지 연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때마침 지역 순찰을 하던 패트롤카를 만나 에스코트 요청을 하기에 이르렀고, 뒤늦게 우리 일행을 찾아오던 경찰차량은 지역 순찰로 바꾸어(무전연락으로) 겨우 주자의 레이스에 평정을 찾을 수가 있었습니다.
거리에서 성묘객과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시민들은, 우리를 향한 격려의 박수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오전부터 음산했던 날씨가 연산군을 지날 무렵부터 빗방울 되어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빗길에서 이상하게도 대철은 속도가 빨라지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심리적 부담이었을 것입니다.
비가 오는 논산역은 인파로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갖은 고생 끝에 논산군청에 도착한 우리 일행을 한가로이 맞이하는 사회과장의 씁쓸한 표정은 너무도 아이러니 하였습니다.
오후에는 푸른하늘가족모임의 홍보부장 백은열씨가 숙소를 찾아왔습니다. 추석이니, 저녁 식사를 같이하자는 권유를 뿌리칠 수 없었습니다.
백은열씨 집을 향하는 우리는, 올 여름 폭우가 가져온 피해가 얼마나 컷는지, 부여와 서천일대를 보고 아연 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농지는 둑이 터져 넘친 빗물에 떠내려가 아예 모래사장으로 변해 있었고, 생명력 강한 몇 포기 벼가 이삭을 맺지 못하고 자라고 있었습니다.
어디가 도로이고 어디가 논인지 구분조차 없는 들녘을 보면서, 농민의 아픔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농민들이여! 용기를 갖으소서!!
시련은 새로운 도전을 의미합니다.
1987.10. 8.
논산-군산(55km)
집으로 귀향하지 않은 채, 어제 밤늦게 하루종일 버스를 타고 나를 만나기 위해 푸른하늘의 체육부장 정금성씨과 함께 온 봉사원 김순옥씨를 (훗날, 필자의 아내) 아쉽게 서울로 보내고, 군산을 향해 출발하였습니다.
공식 행사 없이 논산 군청을 출발하여, 강경, 익산, 임피, 군산공설운동장을 거쳐 무사히 군산 시청에 도착하였습니다.
1987.10. 9.
군산-전주(49km)
군산 부시장과 20여명의 시청직원, 지역 장애인단체장 십여 명의 따듯한 환송을 받으며 전주를 향했습니다.
휴식 없이 일주일을 달려 온 주자는 물론이고, 진행원 모두는 지칠 대로 지쳐 있었습니다.
군산을 출발하여, 전북도청을 향한 20km 지점인 삼거리에서 이리 시청직원 3명과 보명원(장애인시설단체) 원생들이 꽃다발을 들고 반갑게 마중 나와 있었습니다.
잠시 휴식을 취하며, 보명원생들과 환영 나온 이리시장을 대신한 시청직원에게 행사 기념품과 기념 T셔츠를 나누어주었습니다.
자신도 ‘선배들처럼 굽히지 않는 의지의 장애인이 되겠다’고 결의에 찬 표정을 짓는 어린 소년을 뒤로 한 채, 도착지를 향한 길을 재촉했습니다.
출발 40km 지점인 호남 제1관문을 막 통과할 무렵, (주)일화 전북 총대리점 직원들이 맥콜 5박스와 화환을 우리 일행에게 전달하며 격려해 주었고, 지방 언론사, TV방송사들의 촬영과 취재경쟁으로 주자의 피곤함을 더했지만, 참아야했습니다.
장애인용 오토바이 5대의 호위와, 지역 장애인 휠체어 육상선수 2명과 우정의 행진을 하며 전북 도청에 차질 없이 약속된 시간에 도착하였습니다.
남북통일국민연합 김삼채 전북도위원장과, 전북도청 장현돈 보건사회국장을 비롯한 50여명이 맞이하는 환영행사를 KBS가 취재하였습니다.
석간 TV뉴스에서 상세히 보도되는 우리일행의 모습을 보면서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1987. 10. 10.
전주-정주(46km)
도청 보건사회국장의 환송을 받으며, 정주를 향했습니다.
짧은 구간이지만 비포장 도로 때문에 오늘은 고생을 예상해야 했습니다.
농업지도자교육원을 거쳐, 김제군의 금구면을 경유하는 12km 지점부터 교각공사에 도로사정이 퍽 좋질 않았습니다. 금구면사무소를 지날 때부터 5.4km 구간은 아예 비포장 도로였습니다. 그러나 강한 훈련으로 단련된 대철은 그 비포장 도로 구간을 1시간10분만에 돌파하는 괴력을 과시하여 다시 또 나를 놀라게 하였습니다. 2번이나 펑크난 타이어를 교체하지 않았다면, 더 빠를 수 있었으리라는 아쉬움이 남는 순간이었습니다.
금평농협 창고를 지나 원평 초등학교에 이르자, 신태인 입구까지 다시 또 도로 공사에 비포장이 시작되었습니다. 지치고 지친 대철은, 눈의 초점이 흐리고, 동공이 또렷하지 않았습니다. 강제로 휴식을 시켜야 했습니다.
그 때 우리의 모습을 지켜보며 따라오던 분이 식사대접을 하겠다면서, 자신이 운영하는 중식당으로 안내하였습니다.
면장의 일을 맡아보신다던 그 분은, 동네 분들을 모두 불러 모아 마치 무용담의 주인공이 된 듯, 전국토를 달리는 주자처럼 실감 있게,(때론 주자보다 더욱 리얼한 표정을 지으며...) 마을 주민에게 설명하였습니다.
융숭한 점심식사 대접을 받고, 충분한 휴식을 마친 후부터 대철은 도착지까지 저녁내 면장의 모습을 흉내 내며 장난하는 바람에, 진행원은 오후 내 웃음을 참지 못하였습니다.
1987. 10. 11.
정주에서의 휴식
서울을 출발한지 8日만에 첫 휴식을 정주에서 취했습니다.
그동안 긴장과 피곤에 쌓인 주자와 진행원 모두는 하루 종일 숙소에서 수면을 취하고, 밀린 세탁을 하여 말리느라 무질서한 시골 장터보다도 더욱 어수선하였습니다. 방바닥에는 양말을 깔아 놓고, 옷걸이에는 T셔츠, 츄리닝, 타올등... 온통 방안은 빨래를 말리느라 발디딜 틈이 없었습니다.
보조주자 조수남은 더 이상 달릴 수 있는 체력이 아니었습니다. 같이 있겠다는 수남을 설득하여, 춘천에서 만나 다시 달릴 것을 약속하면서, 아쉬운 작별을 했습니다.
1987. 10. 12.
정주-광주(86km)
휴식을 취한 모두는 가벼운 마음으로 출발을 준비하였고, 대철이도 건강이 회복되어 왕성한 식욕을 나타내었습니다.
그러나 정주에서 광주까지는 비포장 도로가 50km 이상 되었습니다. 차량으로 이동하지 않으면 아니 될 코스였기에, 부득이 차량으로 이동하여 장성부터 레이스를 하자는 나의 설득에도 막무가내로 달리겠다는 대철이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습니다.
하여, 휴일 날에도 불구하고 총무 김영수와 새로운 루트를 확보하느라고, 하루를 바삐 보내었습니다. 그리하여 1번 국도를 포기하고, 정주에서 고창으로 이어지는 산악 간선도로를 현지 답사하여 확정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처음에 측정한 거리보다 20km나 더 우회해야 하는 86km의 장거리였습니다. 더욱이 고창에서 장성에 이르는 산악 도로는 완전히 산과 계곡을 깎아 놓아 도로 폭도 협소할 뿐만 아니라 100개에 가까운 오르막과 급커브, 10%의 경사로이기에 모든 것이 악조건이었습니다.
‘...그래, 대철아. 강원도의 한계령은 네가 상상할 수도 없는, 가파르고 무서운 고갯길이다. 네가 그 곳을 넘기 위해서 이 지역은 하나의 연습이며, 워밍-업이리라...’
모든 진행원은 차에서 내려 호각을 불며 차량을 서행으로 유도하고, 경찰 패트롤카는 전.후방에서 진입하는 차량을 통제하고, 선발 차량은 지역 특성과 각도를 스피커로 알려주며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지칠대로 지쳐 얼굴이 창백해진 주자는 온 힘을 다하여 장장 4km의 오르막을 올라 정상에서 눈을 감고 호흡조절을 하고 있었습니다.
‘자, 이젠 내리막길이다. 컨트롤만 잘하면 힘은 덜들고, 고통도 덜하니 조금만 견뎌다오...’
마음속으로 대철에게 외치고 있었습니다.
사실 순탄한 평지 길보다는 오르막과 내리막이 적당히 연속된 길은 피곤함이 적고, 스릴을 느끼는 쾌감이 더 있습니다.
오르막다운 오르막을 만났고, 내리막다운 내리막을 만난 대철은, 점점 가속도가 붙기 시작 했습니다. 20km, 30km, 40km... 계속 내리막길의 가속을 받은 휠체어는 무서운 속도로 달렸습니다. 차량이나 오토바이와는 달리, 도로 지면에 밀착된 경기용 휠체어는 속도감이 두 배로 느껴지며, 정면으로 부딛치는 바람이 귓전을 스치고 달리는 쾌감은 경기용 휠체어를 타고 달려본 사람이 아니면 느낄 수 없습니다. 급커브를 멋지게 허리로 컨트롤하여, 노란 중앙선을 따라 미끄러지듯 달리는 주자...
커브 길이 계속 이어집니다. 2개, 3개... 속도계가 60km를 가리킬 때, 순간적으로 위험함을 느꼈습니다. 급경사 커브 길에다가, 가속이 62km이상 붙어 제동이 쉽지 않을 것을 예상했습니다.
“대... 대철아, 속도를 줄여...! ”
이야기가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휠체어가 도로의 가드레일을 들이박고 있었습니다.
오! 오! 이런 불상사가...
휠체어는 가드레일을 들이박고 동댕이 처짐과 동시에, 주자는 휠체어에서 튕겨 나와 아스팔트로 굴러가고 있었습니다.
미처 손쓸 사이도 없이 벌어진 주자의 사고에 진행원들은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어깨에 심한 찰과상과 오른손 엄지손가락에 부상을 입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장갑 밖으로 붉은 피가 금방 배어 나왔습니다.
질기디 질긴 가죽장갑에 두툼하게 감은 엘레스틱을 (특수 코무 테이프- 장갑과 휠체어 링의 접지력을 높이기 위한 끈끈한 액이 코팅되어 있는 테이프) 찢고 손가락 깊숙히 살점이 찢겨 나간 것입니다. 순식간에 어깨는 부어오르고 오른손은 전혀 움직이지 못하였습니다. ‘장성기독병원’으로 긴급 후송을 하여 치료를 받았습니다. 불행 중 다행으로 큰 이상은 없었습니다. 충격에 의한 타박상으로 절대적 안정이 필요하고, 최소한 2주 이상은 팔을 무리하게 사용치 말라는 의사의 지시였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20일을 더 달려야 할 머나먼 길이 남아 있었기에 나는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어떻게 준비한 행사인데...!
어떻게 훈련하면서 오늘을 왔는데...!
또한, 오늘은 전국체육대회의 전야제가 광주 전역에서 벌어지고, 시청으로 성화가 봉송되어 오는 날이기 때문에, 우리 일행이 예정 된 오후5시에 도착하여 일정대로 행사를 마치지 않으면, 전국체전의 성화 봉송 도착에 커다란 차질이 생길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 마음은 더욱 조여들어 왔습니다.
그동안 추석 연휴와 귀성객 인파로 행사를 제대로 할 수 없었으나, 오늘에서야 모든 준비 끝에 대대적이고 화려한 시가행진과 공식 환영 행사를 준비를 했습니다.
50인조 화니브라스밴드의(광주화니백화점고적대) 선두로 주자와 지역 휠체어장애자선수의 우정의 행진을 뒤이어, 전남대학교 학생들의 농악대가(20인조) 울긋불긋 장대기를 들고 흥겨운 농악을 연주하며, 광주 수도권에 거주하는 장애인들의 삼륜오토바이(장애인전용오토바이) 40여대가 시가행렬을 하고, 남북통일국민연합소속의 대학생 100여명, 시민, 학생 등 500여명 이상의 규모가 가두행렬을 하여, 이 행사의 도착을 알리는 대규모 시가행진(우정의 행진)이 진행될 예정이었던 것입니다.
200m 벼랑 아래로 떨어져 엿가락처럼 휘어져 버린 경기용 휠체어-선수라면 한 대쯤 소유하고 싶었던 휠체어... 그러나 너무나 고가품 이어서 소유할 수 없었던 그 휠체어...(그 당시180만원이나 싯가하는 장비임)
어떠한 일이 있어도 오늘 이 일정은 마무리해야겠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과거의 선수로서 달려왔던 이 길을, 내가 다시 달려야 할 준비를 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이 행사를 위해 준비하고 도와준 각 단체와 기관에 실망을 줄 수 없다는 나의 생각을 헤아린 듯, 대철이도 무리를 해서라도 시청까지 완주를 하겠노라고 완강하게 요청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부서진 휠체어를 차에 싣고, 교체용 휠체어에 다시 올라앉는 주자를 보았을 때에, 나는 애써 눈물을 감추려 먼 산을 바라보았습니다.
대철이는 병원에서 진통제를 맞았지만 통증을 참아 내느라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습니다.
광주교도소 앞에서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던 우정의 행진 팀과 합류하여, 그 대열은 장장 2km가 넘었습니다.
우렁찬 화니브라스 밴드의 연주와 흥겨운 농악대의 몸짓으로, 거리로 쏟아져 나온 시민과 행인, 학생 모두가 하나 되어 시청 진입로는 아예 교통마비가 되었습니다. 한 시민은 체전의 전야제와 성화봉송 행사가 이토록 화려하고 큰 것은 처음 봤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잠시 후 행사의 내용을 알게 된 그 시민은 너무도 용감하고 장한 주자에게 할 말이 없다며, 손바닥이 터지도록 힘찬 격려의 박수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광주시장, 한국장애자재활협회 전라지부장, 남북통일국민연합위원장등 수많은 지역 단체장과 주요기관장의 따뜻한 환영과 꽃다발을 받으며,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저녁 식사를 하면서, TV에 비친 우리 일행의 화려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차질 없이 마무리 된 오늘의 행사에 긴 한숨을 쉬었습니다.
1987. 10. 13.
광주-목포(80.5km)
어제의 화려함과 발 디딜 틈마저 없었던 광주시청은 말끔하고 깨끗이 정돈되어 있었습니다. 출발을 향한 준비가 한창이었으나, 주자의 어깨와 손가락부상에 의해 아무래도 오늘의 목포시청까지 80.5km의 구간은 불가능하다는 판단에 광주시내를 통과하고 자동차로 이동하기로 하였습니다.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서울장애자올림픽대회 조직위원회 고귀남 위원장이 격려 차 오셨고, 1人 창무극과 판소리의 명인 공옥진 여사가 예정에 없이 참석 하셨기에 나는 놀랐습니다. 너무도 반가와 하시는 공옥진 여사를 뵙자 작년의 일이 생각났습니다. 심신장애자사회단체인 푸른하늘가족모임의 회장시절에 특별한 인연으로 알게 된 분이었습니다. 평소 어머니처럼 모시고, 아들과 같이 아껴 주시던 분이었기에 더욱 반가왔습니다.
작년에 실시한 제2차 제주-서울간 국토종단 때 일입니다. 광주와 대전에서 두 차례나 자선공연을 해 주셨고, 주자들에게 체력소모를 보충해 주기 위하여 손수 장만하신 횟거리를 얼음에 채우고(내가 생선회를 좋아하는 것을 알고) 몸보신에는 개고기가 제일이라며, 각종 영양식을 가득 담아 바쁜 공연 스케줄을 연기해 가며, 이곳까지 내려와 손수 만들어 먹여 주시던 일이 새롭습니다. 개고기를 먹지 못하는 내게 소화 흡수와 체력보강에는 더 없이 좋다며 강제로 먹여 주셨고, 그 덕에 배탈이 나서 누워있을 때, 손수 죽까지 끊여주시던 기억이 새로운데, 여기서 뜻하지 않게 상봉을 하게 되니 더 없이 반가웠습니다.
어제 저녁에 TV에서 나의 모습을 보고 버선발로 달려왔다며, 밤새 수소문을 해도 찾을 수 없어, 출발 장소에 새벽부터 나와 기다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오전 출발 행사는 간단한 보고로 출발식을 대신 하였습니다.
어제 도착 행사와는 대조적일 만큼 조용하였습니다.
서울장애자올림픽조직위원회 고귀남 위원장의 격려와 남북통일국민연합 전남지부 사무국장, 한국장애자 재활협회 전라지부장의 환송을 받으며, 목포를 향한 80.5km의 일정이 시작되었습니다.
전국체육대회가 광주를 중심으로 위성도시에서 분산되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목포구간의 국도 변에서 사이클 경기가 진행되고 있어서, 여간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않되었습니다. 기록경기인 만큼 선수들에게 지장을 주어서는 않되기에 퍽 신경을 썼습니다.
공옥진 여사는 이번 체전의 시범종목에 참여하는 장애인 선수를 격려차 주경기장을 다녀오겠다고 하시며, 오후에 우리 팀과 합류하기로 하였습니다.
출발지점에서 10km인 광산군 경계지역에서 공여사와 헤어진 일행은 어제 부상에 의해 고통스러워하는 주자를 살피고 만약, 주행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면 즉시 차로 이송 시켜서 약속된 지점에서 대기하라고 이르고, 목포의 행사준비 점검을 위해 나는 먼저 도착지를 향했습니다. 체육대회 일정과 목포시청에 정부 최고 관리가 오늘 순시할 예정이 생겼다고 일정을 조정하라는 시청의 연락을 받아 급히 도착지에 가지 않으면 않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시청에 도착하자 삼엄한 경계와 통제로 도착 행사를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해서 우리일행은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숙소로 바로 도착하기로 일정을 변경하였으나, 목포시의 숙박장소가 체육대회 관계자와 선수로 이미 만원이 되었고, 예약을 한 숙소에 업주의 얄팍한 이기심으로 일행의 숙소가 묵을 수 없게 되어, 수소문 끝에 겨우 숙소를 마련하는 촌극도 벌였습니다.
백제여고를 지나, 61km지점인 ‘해바라기집’에서 합류하기로 되어 있던 주자와 일행은 도착시간이 지나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길이 엇갈렸나 싶어, 광주까지 왕복을 하였으나 일행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불길한 생각도 들고, 불안함과 초조감에 견딜 수 없었습니다. 마지막 방법으로, 목포시청으로 찾아가 행사 팀이 도착했는지 확인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급한 마음으로 목포를 향하여 달리는데, 뒤를 따라 오던 택시가 전조등을 깜박거리며 차창 밖으로 손짓하며 소리치는 목소리가 하도 커서 금방 공옥진여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 일행이 약속장소에 없어서 목포시청까지 갔다가 되돌아오는 길에 겨우 만난 것이었습니다. 공옥진여사 역시 왕복하는 동안 주자와 진행원과 장비를 실은 차량은 만나지 못했다고 하니, 필경 사고가 난 것이 라고 더욱 안타까워했습니다. 무전기는 몇 칠 전 식당에서 두고 나와 잃어버린 것이 두고두고 생각났습니다. 무전기만 있으면 서로가 위치를 금방 파악 할 수 있을텐데......
목포를 향한 조급한 마음으로 급히 차를 달리는데, 아른아른 사이카의 경광등이 시야에 들어왔고, 주자는 열심히 달리고 있었습니다.
어찌된 영문인지 진행원에게 물었더니, 차로 이동할 수 없다는 주자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서 잦은 휴식을 취하며 오던 중, 한적한 장소에 앉아 모두 2시간 이상 잠을 잤다는 웃지 못 할 이야기를 듣고, 나는 싱겁게 웃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두가 얼마나 힘들고 피곤했기에...
기특하게도 대철은 부상한 몸으로 80.5km 구간을 완주하였습니다!
영광에 있는 공옥진여사 댁에서 저녁을 먹고, 넓은 연습실에서 북과 장구를 치며 철없는 아이들처럼 즐거워하였습니다. 서투른 장난으로 제흥에 겨워하는 일행의 모습을 보니 저절로 하루의 피로가 씻겼습니다.
공여사의 어린 문하생들의 판소리를 뒤로하고 숙소로 돌아왔을 때, 모두들 곤한 잠에 빠져 차안에서 내릴 줄을 몰랐습니다.
1987. 10. 14.
목포-보성(88km)
오늘은 목포 보성간 88km를 달리는 일정입니다.
건강이 회복되려면 아직 이른데, 코스는 점점 길어지고 해안선을 인접한 도로이기에 굴곡과 바람의 영향 또한 클 것으로 예상하여 퍽 염려되었습니다.
시내 중심도로에는 정,사복경찰이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시청까지 통제 된 상황이라 하는 수 없이, 터미널에서 외곽 지역으로 연결되는 도로를 택하여, 경찰지원 없이 선두차량과 후미차량 간에 비상등을 켠 채, 달려오고 가는 차량을 통제하며 강행군을 했습니다.
짙은 안개와 쌀쌀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영산강 하구 둑을 지날 때엔 마음이 못내 우울하기조차 했지만, 침체 된 분위기를 바꾸지 않으면 않되었기에, 진행원 모두를 차에서 내려 주자와 함께 뛰게 하였더니, 금방 주자도 진행원도 흥에 겨워 노래와 구호를 외치며 힘차게 달렸습니다.
영산호관광종합휴게소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휴식를 취한 다음 계속 달렸습니다. 주자는 어깨의 부상이 회복이 되었는지, 오늘은 속도에 제한을 두지 않고 경쾌하게 달렸습니다.
해안 도로에 만발한 코스모스와 어우러져 푸른 바다는 더욱 아름다웠습니다.
바닷내음은 신선한 향수 되어 옷깃을 적시고, 안온한 해안의 숲은 태초의 모든 이에 마음의 고향과도 같은 향수를 느끼게 했습니다.
힘차게 달리는 주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노인께서는 웬 유모차를 타고 달리냐면서 혀를 차며 아파하는 모습에 나는 고마움을 느껴야 했습니다.
휠체어가 되었든, 유모차가 되었든, 관심을 갖아 주고 지켜봐 주는 사실이 중요하였던 것입니다.
급경사 고갯길을 올라 장흥을 지날 무렵이었습니다.
불쑥 1000원을 건네주며, 어리둥절하던 주자에게, 이 돈 안 받을 거냐면서 퉁명스럽게 말하던 중년 남성이 우리 진행원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습니다.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음료수라도 사 먹으라는 퉁명스런 말과는 달리, 그의 표정은 너무도 다정스러웠기 때문이었습니다.
보성군청에 도착했을 때 이미 해는 지고, 저녁놀이 온 세상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습니다. 안재호 군수를 비롯한 20여명의 직원들의 따뜻한 환영과 하교 길의 학생 200여명이 갑자기 몰려들어 작은 군청은 인산인해가 되었습니다.
TV에서 국토종단 행사를 보았다면서, 학생들의 싸인 공세에 둘러 싸여 빠져 나오질 못하였습니다.
상수도 공사로 단수되어 있음을 알고 소방차에 물을 담아 숙소로 보내주셨던 군수의 따뜻한 배려를 잊을 수 없었습니다.
부녀회에서는 음료수를 가지고 숙소로 격려 방문을 하였고, 군청여직원은 손수 장만한 떡을 가지고 찾아 왔습니다.
다시 한 번 군수, 군청직원, 그리고 학생, 군민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1987. 10. 15.
보성-순천(53km)
세심한 배려를 하시는 군수의 환송을 받으며, 보성의 따뜻한 기억을 가슴에 간직한 채 순천을 향하여 출발하였습니다.
비교적 어제에 비하여 짧은 거리였기에 마음의 여유를 갖고 달렸습니다.
해안의 남단으로 가면 갈수록 바람은 거세었지만, 곳곳에서의 온정은 너무도 고맙기만 하였습니다.
순천시청에 도착하니 부시장을 비롯한 공무원, 지역 기관장등 50여명의 진심 어린 환영이 있었습니다.
1987. 10. 16.
순천-남해(80km)
순천의 하늘은 맑고 푸르러 눈이 시렸습니다. 퍽 상쾌한 아침입니다.
부시장의 환송을 받으며, 9시15분에 시청을 출발하였습니다.
해안지역이므로 상식적으로 도로가 평탄하고 언덕이 없을 것 같이 생각되기 쉽습니다만, 사실은 정반대입니다. 해안의 드나듦으로 도로는 상당한 굴곡이 있고, 급경사 오르막길과 내리막길로 이어져 있어서 경치는 뛰어났지만, 휠체어가 달리기엔 지옥의 코스와 같았습니다.
오늘은 전라도 지역을 벗어나는 경계지역이기에 새로운 각오를 해 봅니다.
대철은 아침부터 콧노래를 부르며 퍽 마음이 들떠 있었습니다. 8日동안의 전라남북도를 횡단해 경상도 지역으로 진입한다는 의미도 있겠으나, 남해를 지나면 고향인 삼천포와 가깝기 때문에 절로 신이 났던 모양입니다.
하동을 막 지날 무렵에는 가을 소풍을 가는 어린 국민학생들이 길가에 서서 힘찬 박수로 격려하였고, 구호까지 외치면서 성원해 주는 선생님도 계셨습니다.
주자도 진행원도 모두 하나가 되어 흥이 났습니다.
대나무 숲에서 우는 바람소리는 더욱 하동의 기억을 오래 간직하게 하였습니다.
고향의 땅을 지나는 주자는 휴식도 무시한 채 콧노래를 불러가며, 동네 작은 마을까지 세세히 설명해 가며 쉬지 않고 달렸습니다.
남해에 들어서면서 60km지점인 신기마을은 급커브에다 내리막과 오르막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해안도로입니다. 그러나 지칠 줄 모르는 대철의 멋진 레이스는 나를 지난날의 선수시절로서 돌아가게 하는 충동을 일으키게 하였습니다.
예정된 도착 시간보다 10분 늦은, 5시10분에 남해 군청에 도착하였습니다.
남해군수, 군청직원 40여명과 경찰서장, 군 교육장, 남해여중 교직원 및 학생들이 마중 나와 뜨거운 환영을 해 주었습니다.
1987. 10. 17.
남해-진주(60km)
오늘은 남해를 출발하여 주자의 고향인 삼천포를 경유하여, 진주시청에 이르는 60km 구간입니다.
시청을 출발하여 26km를 달려오는 동안 남해군청의 관계자는, 세심히 배려하며 신경을 써 주었습니다.
이동면을 지날 때였습니다. 면사무소 앞에서 면장을 비롯하여, 지서장, 지역주민 40여명이 일정에 없이 갑자기 나타나 꽃다발과 음료수를 제공해 주며 격려하였고, 초등학교 어린 학생들도 도로 양쪽에 서서 격려의 박수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창선면을 지나 갈 무렵에는 면장, 지서장, 주민 100여명이 일정에 없던 꽃다발 증정과 길가에 나와 격려를 해 주었습니다.
갑작스런 환영식에 우리 일행은 의아해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내용을 알고 보니, 남해군수가 우리의 경유지를 미리 알아내어 지역 기관장에게 격려를 지시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시 한 번 군수께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창선에서 선박을 이용하여 20분간 항해하여, 삼천포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더욱 놀랐습니다. 사전에 연락 없이 도착한 주자의 고향에서는 어떻게 알았는지 대철의 어머니와 가족을 비롯하여, 삼천포시장, 경찰서장, 시 교육장, 지역 주민들이 포구에 마중 나와 있었습니다.
『삼천포가 낳은 세계기록보유자 천대철 환영!』
『장하다! 휠체어 국토종단2000km 대행진!』
각종 플랭카드가 곳곳에 걸려있고, 주민들은 피켓을 들고 열렬한 환영을 하였습니다.
여기저기서 꽃다발 세례에 정신이 없었고, 평소에 과묵하신 대철의 어머니도 눈물을 애써 감추고 계셨습니다.
일정에 없던 환영식이 곳곳에서 벌어져 많은 시간을 지체하였기에, 40km 여정을 휴식 없이 달려야 했습니다. 어찌 된 일인지 주자는 오늘 따라 휠체어에서 자주 떨어져 넘어지는 것이었습니다. 함께 동승한 대철의 어머니는 그 모습을 보며, 자식이 넘어지는 모습이 안타까와 눈물을 감추지 못하였습니다.
쉬지 않고 고향 길을 달린 대철은 예정보다 25분 빠른 4시35분, 진주시청에 도착하였습니다. 진주시장, 경찰서장, 시 교육장, 남북통일국민연합 경남사무국장, 시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도착보고를 마치고 하루의 긴 여정을 풀었습니다.
대철의 어머니는 저녁 식사를 준비했으니, 꼭 집으로 와서 식사를 같이 하자고 하였습니다.
집을 떠난 지 15일 만에 식사다운 식사를 할 수 있었고, 왕성한 식욕을 자랑하던 진행원 최오암, 박광호, 이봉섭은 아예 밥상 전체를 깨끗이 비워 버렸습니다.
고된 훈련과 행사일정에 쫓겨 만나지 못했던 가족과 상봉한 대철을 집에 두고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진주에서 2박을 하면서, 밀린 세탁과 충분한 휴식을 취하였습니다.
1987.10. 19.
진주-부산
진주를 거처 마산. 부산을 향하여 이틀을 달렸습니다.
부산에서 당초의 계획은 시청으로 도착하여, 광주행사보다도 더욱 크고 화려한 행사를 준비하였으나, 현지도로사정과 (지하철공사로인한) 갑작스런 코스 변경에 따른 현지행사 담당자의 좌표 실측보고로 어이없이 1개월여 동안 준비한 도착 행사가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정말어이 없고 기막힌 사고였습니다.
부산시의 전철과 지하철 공사로 도로는 전 구간이 교통체증이 심했고, 도로공사 측은 이 행사의 뜻과 취지에 협조할 수 없다는 당초 약속과는 다른 입장을 취하였습니다.
할 수 없이 시청 도착을 양보하여, 구덕종합운동장으로 도착지를 변경 수정해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부산 도착 환영 행사 진행 담당인 남북통일국민연합 부산사무국에 새로운 루트를 확정하여, 보고 해 달라고 하였는데, 당초 거리보다도 10km가 더 먼 88km라고 알려 왔습니다. 그러나 거리상으로는 이미 그 거리도 지났고, 도착 예정시간 보다도 1시간이 지나도 행사장의 끝이 보이질 않았습니다. 갑자기 바뀐 일정이라도 내가 직접 실측하지 못한 것이 커다란 실수였습니다.
처음 측정해 놓은 거리는 78km이었으나, 우회도로는 보고된 실제거리보다 알려온 88km보다도 더 먼 91km 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체력의 안배를 하며 달려야 했던 주자는, 그만 탈진하고 말았습니다. 더욱이 2시간이 지나도록 행사장에 도착 못하자 기다리던 초청내빈들은 발길을 돌렸고, 급기야는 도착행사를 취소하는 불상사가 벌어졌습니다.
지난 10月3日 출발하여 17일간의 일정이 처음으로 무산 된 것입니다. 부상을 당했어도 일정을 맞추는 우리였는데......
KBS-TV, MBC-TV, 연합통신 등 수많은 방송 취재차량과 보도기관은, 우리일행이 약속된 지점에 나타나지 않자, 차량에 카메라를 탑재한 취재차량이 주자가 달리고 있는 도로까지 쫓아와 카메라에 그림을 담았고, 각 방송사마다 취재 경쟁이 벌어져 그 과정에서 주자가 무리하게 오버페이스를 하는 바람에 거의 탈진 상태가 되었고, 가뜩이나 통제된 도로가 퇴근 시간에 맞물려 그야말로 교통마비가 되는 불상사까지 벌어 졌습니다.
그래도 부산시민들은 불편함을 뒤로한 채 반가운 표정으로 격려의 박수를 잊지 않았습니다.
나는 지친 진행원과 주자에게 피로회복제를 재공하기 위하여 약국에 들려 드링크제 두 박스와 비타민를 샀습니다. 그런데 어찌 이런 우연이 있겠습니까?
장애자올림픽 대표선수 강화훈련을 함께 받던 선수의 어머니가 경영하는 약국엘 들어간 것이었습니다.
합숙훈련소에서 72명의 선수 중(육상부원; 필드, 트랙을 포함한) 연장자인 나로서는 선수 하나 하나에 관심을 갖지 않으면 않되었습니다. 휠체어를 탄 중증 선수와 비교적 행동이 자유로운 경증 선수를 한 조로 구성하여, 훈련에 서로 도움이 되도록 하며, 침상도 함께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야만 불편한 선수들도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기 때문에 배려한 나의 조치였습니다. 그 때 나를 보고 너무나 고마워하던 일이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처음 부모의 품을 떠나 훈련소 생활을 하는 자식의 염려로 부산에서 일산 홀트체육센터 까지 주말이면 면회를 빠지지 않고 온다던 심재호의 어머니...
강인한 선수를 만드는 데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면회를 제한했던 내게 면회를 사정하던 그 분.
심재호 어머니를 이곳에서 만나게 될 줄을 어찌 알았겠습니까?
재호의 극적인 만남으로 시간가는 줄 몰랐습니다. 재호의 부모님이 마련해 준 훌륭한 숙소에서 여장을 풀었습니다.
다음날-
구덕종합운동장보다 비교적 교통이 혼잡하지 않은, 사직종합운동장을 출발하여 울산. 경주. 대구. 영천. 포항. 영덕을 경유하여 동해안을 따라 올라가는 동안, 대철의 체력은 소모될 대로 소모되었고, 진행원들도 이젠 하나의 기계처럼 자신이 맡은 임무에만 전력할 뿐. 농담도 장난도 하지 않았습니다.
잠깐의 휴식시간이면 차에 누워 코고는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생각하였습니다.
남북으로 허리가 잘린 이 강토 이 강산이 바로 장애자임을 인식하고, 우리의 집념과 염원이 남북통일의 보탬이 될 수 있다면 그 어이 기뻐할 일이 아닌가.
또한, 장애인은 바로 우리의 이웃이며, 형제이고 가족이기에, 스스럼없이 자원 봉사에 나섰던 진행원들... 진행원들에게 감사한 마음이 떠나지 않는 하루였습니다.
고마운 진행원을 소개합니다.
박민근-막내 동생의 친구입니다.
작은 몸집에 외소하게 보이지만 태권도 유단자로서 다부지고 민첩하며, 상황 판단이 뛰어납니다. 국회의원에 출마한 부친의 선거운동도 뒤로 미룬 채, 필자가 탄 선두차량을 운전합니다.
박광호-듬직하고 우직한 전형적인 농촌 총각입니다.
많은 소를 사육하며, 요즈음 벼농사의 수확을 해야하는 중요한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나의 일을 돕겠다고 나선 막내 동생의 친구입니다.
장비수송과 후미차량 운전을 맡고 있습니다.
서금동-대학을 휴학하고 군 입대를 기다리는 친구입니다.
스포츠 맛사지를 전문으로 하며, 주자의 건강체크와 비상의료를 담당하는 대식가입니다. (대철이 어머니가 싸 주신 쥐포15kg 한 부대를 일주일 만에 혼자 다 먹어 치운 장사(?)입니다.)
이봉섭-후미차량 운전과 교통정리, 코스확보, 도로점검 등을 합니다.
주자의 휠체어 주행에 지루함을 덜기 위하여, 휠체어 주자와 함께 맨발로 달리기를 하는 주력 좋은 만능 스포츠맨이며, 보디빌딩을 하는 멋진 사나이입니다.
최오암-필자의 막내 동생입니다.
80kg의 거구에 고교시절 태권도 선수로서 큰 활약을 하였고, 현재 체육지도자로서 태권도계에 큰 기여를 하고 있습니다.
진행에 대한 업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김영수-국제기독학생연합회의 중부지부장을 맡고 있는 신앙인입니다.
본인이 제주도 한라산 정상까지 오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며, 재정담당을 하고 기획과 진행을 맡아온 수고가 가장 많은 분입니다.
겨울을 재촉하듯 동해안의 바람과 빗방울은 금새라도 살을 얼릴 것만 같아, 멀지 않아 추위가 올 것을 예상하면서도, 우리의 일정과 역주에는 변화가 없었습니다.
물 맑고 깨끗한 동해안 바닷가 울창한 숲! 정말 자연의 아름다움과 위대함을 찬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히 울진과 삼척을 지날 무렵에는 해안선의 아기자기한 무인도와 바위섬들, 그리고 해초를 따는 해녀들의 손짓은 차라리 한 폭의 그림이었습니다.
내 강산. 내 강토. 저 바닷가에 굳게 드리워진 철망은 왜 걷을 수 없는지...
허리 잘린 내 강산을 위하여 오늘은 실컷 통곡하자!
저 철망에 멍들은 강산을 위해 아파하자.
신체의 불편함 때문에, 이 자연을 찬미하고, 산하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느낄 수 없는 장애인들에게 나는 죄스러움마져 느껴야 했습니다.
더 열심히 보고, 느끼고 아름다워하자!!
그리고 본 대로 느낀 대로 그들에게 알려주자.
이것이 내게 주어진 사명이라면 다 해야지......
그리고 장애를 극복하며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이 사회의 구석구석에 알려야지...
“우리도 하면 된다!”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것을...
1987. 10. 31.
강릉-속초(67km)
강릉을 출발하여 속초에 도착할 동안 종일토록 비가 내렸습니다.
주자의 체온유지와 감기를 염려해 30~40분 주행하고 차안으로 옮겨 꽁꽁 얼어버린 온 몸을 녹이고, 맛사지로 굳어진 근육을 풀어 주면서 달리기를 수없이 반복하였습니다.
속초에 도착하였을 때 주자의 모습은 파랗게 얼어 입도 벌리지 못한 채 떨고 있었고, 비에 젖은 옷에서는 빗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주자의 심한 감기와 오한으로 밤새도록 나를 불안케 하였습니다.
내일의 휴식이 끝나면 이번 행사의 최대 고비이며, 가장 어려운 한계령을 넘는 일이 남아 있습니다.
밤은 깊을수록 계속 빗소리는 커지고 잠을 좀처럼 이룰 수 없었습니다.
속초에서 2박을 하며 휴식을 취했습니다.
1987. 11. 2.
속초-인재(63Km)
서울을 출발한지 꼭 한 달이 되는 날입니다.
사흘을 쉬지 않고 내린 비가 그쳤지만 짙은 안개가 끼어 음산한 아침입니다.
비가 오지 말아야 할텐데...
이틀을 휴식한 주자는 감기의 열은 내렸지만, 그 동안 체력이 거의 소모되어 탈진 상태였고, 한기를 느끼게 하는 쌀쌀한 기온은 주자를 괴롭힐 것이 분명하니, 걱정이 앞섰습니다.
수 백 개의 고갯길로 이루어진 한계령은 자동차로 넘는 것조차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욱이 걸어서 오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설악산을 한번쯤 다녀온 사람은 구지 설명이 필요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지금 이곳을 휠체어에 몸을 싣고 맨손으로 휠체어바퀴 링을 굴려 넘어야합니다.
출발할 때 만발했던 코스모스는 간 데 없고, 짙은 단풍으로 물든 설악은 계곡마다 수북이 낙엽이 쌓여, 벌써 겨울을 재촉하고 있었습니다.
과연 이 길을 대철이가 넘을 수 있을까...
이 날을 위해 얼마나 많은 훈련을 했던가...
작렬하는 태양을 안고 끝없는 해변에서 휠체어달리기를 했던 나날들- 바퀴가 모래에 빠져 속도를 늦추면 나올 수 없는 고통...
성남 상대원 고개에 합숙소를 마련하고 남한산성 남문까지 오르내리던 지옥훈련들...
성남 상대원에서 양재동을 거쳐 잠실로 돌아 송파에서 장지동과 복정동을 거쳐 숙소까지 왕복하면서 평균 80km의 코스의 지옥훈련 받았던 기억들이 나의 눈앞에서 어른거리며 무슨 수를 쓰더라도 기필코 한계령을 넘으리라는 다짐을 해봅니다.
국제기독학생연합회 중부지부 소속의 대학생 7명이 전공 시험을 보류해가면서 대철을 응원하겠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너무도 반가운 만남이었습니다. 한라산 정상까지 나를 데려가기 위해 혼신의 고생을 했던 후배들을 제주에서 헤어지고 이 행사준비를 하느라고 고맙다는 말도 제대로 못하였었는데 이곳까지 응원을 오겠다니 얼마나 반가운 일인가...
오색약수에서 기다렸다가 진행 팀과 합류해서 한계령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빗줄기는 시야를 가릴 정도로 쏟아져 내리고 방수 옷을 입었지만 주자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미 옷 속으로 물이 스며들어 고여 있었습니다.
이러한 악천후 속에서도 오직 달려야한다는 정신력 하나로 오르고 또 오르는 일만 계속 될 뿐이었습니다.
교통정리를 해주던 인제경찰서 소속의 경찰관은 ‘어찌 차에서 편히 교통정리만 하면서 오를 수 있단 말인가?’ 라고 외치면서 한계령을 걸어서 함께 오르고 있었습니다. 순찰차를 운전하던 경찰관은 스피커로 격려 구령과 함께 노래를 불러 주기까지 하였습니다. 모두가 하나 된 이 순간을 잊을 수 없습니다.
“국토종단-장애자만세!”
“파라림픽-성공개최!”
“힘차게 힘차게-국토종단!”
누가 시킨 것도, 하자고 외친 구호도 아니었습니다.
한계령을 오르며 외치는 구호는 설악산을 찌렁찌렁 울려 계곡에 메아리쳤습니다.
쏟아지는 빗물이 눈물을 가렸지만, 대철은 그 순간 너무 고통스러워 울면서 올랐다고 내게 행사가 끝난 후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이 순간에 어찌 대철이만 눈물을 흘렸겠습니까?
운전을 하던 박민근도 경적으로 장단을 맞추면서 연신 눈물을 닦아 내었고, 함께 뛰어 오르던 진행원 박광호, 최오암, 서금동, 김영수, 이봉섭도 모두 대철을 향한 응원과 구호를 외쳤고, 전국 백만 장애인의 집념을 위해 우리 모두는 뜨거운 눈물을 쏟았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해발 900m의 한계령을 맨손으로 휠체어를 굴려 한계령 휴게소 정상에 올랐습니다.
대철의 어깨와 등에서는 무럭무럭 김이 오르고, 발 끝에는 고드름이 얼어 있었습니다.
한계령 휴계소에 도착하여, 그 험하고 잔인했던 고갯길을 내려다보며 우리 팀 모두는 활짝 웃으며 만세를 외쳤습니다.
이젠 끝났습니다. 어느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목숨을 건 한계령을 정복한 것입니다.
우리 국토종단 팀의 목적은 성공했습니다.
오색찬란한 단풍이 보일듯 말듯한 안개에 쌓인 계곡을 넘어서 18km나 되는 한계령의 깍아지른 오르막길을 단숨에 오른 우리이거늘 무엇이 두려우리오...!
춘천을 거처 구리, 임진각의 코스는 이젠 하나의 절차일 뿐이었습니다.
이 고통이 무엇을 향한 의지입니까!
무엇을 향한 집념입니까?
장애를 지녔기에 한계령을 오를 수 있었고, 분단 된 조국의 아픔이 장애인의 고통이었기에, 서해안을 돌아 남해안을 거쳐 동해안을 따라 전 국토 2000km를 휠체어에 몸을 싣고 건강인도 상상키 어려운 국토종단을 완주할 수 있었습니다.
이젠 장애인이기에 할 수 없다는 부정적인 생각은 이사회에서 거두어야 하겠습니다.
이들에 대한 그릇된 편견을 거두고 조금의 관심과 배려만 할 수 있다면, 우리 사회는 한층 아름답고, 살기 좋은 나라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복지국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1987. 11. 8.
임진각 도착
드디어 우리는 전국 휠체어 국토종단 2000km 대행진의 종주를 임진각에서 마칠 수 있었습니다.
오늘은 제2차 남북통일염원 전국대학생대회를 통해, 통일로에서 임진각까지 전국의 대학생 4000명이 마라톤을 하게 됩니다.
오늘 이 행사는 이번 2000km휠체어국토종단대행진의 임진각 도착 행사에 맞추어 함께 진행되는 이밴트행사입니다.
문산여자종합고등학교 운동장에서 서울장애인올림픽대회 조직위원회 조일묵사무총장이 출정사를 낭독하고, 주자 천대철과 4000명의 건각들이 통일을 향한 염원을 안고 임진각으로 달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게 무슨 기적입니까? 4000명의 건각들을 제치고 33日 동안 2000km를 달려온 대철이가 당당히 1위로 골인하였습니다. 대철의 인간승리에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습니까.
남북통일국민연합의 이항령 박사와 한국장애자재활협회 문병기회장의 뜨거운 격려사와 더불어 장애인사회단체 언론사. TV. 방송사가 우리에게 격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 행사를 통하여 통일교의 문선명님은 장애인 장학금 및 재가 장애인의 보장구 구입에 사용해 달라고 1억 원을 기증하였습니다. 이 행사를 위하여 몇 달을 집에 들어가지 못한 채 고생한 보람을 보상받는 순간이었습니다.
장애인이기에 할 수 있었습니다.
장애인이기에 불가능을 가능케 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본 행사비용을 아끼고 남긴 1백7십7만8천원과 문선명님이 기부한 격려금 1억원을 한국장애인재활협회에 기부하였습니다.
끝으로, 본 행사를 위해 자원봉사를 아끼지 않은 준비위원 김영수. 박민근. 이봉섭. 박광호. 서금동. 최오암씨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장애인을 위하여 격려금 1억원을 주신 문선명님, 그리고 본 행사를 후원해 주신 남북통일국민연합과 사단법인 한국장애인재활협회와 그리고 장애자올림픽대회조직위원회, 내무부, 치안본부, 보건사회부, 도. 시청 및 군청의 임직원들, 각 시.도 경찰국, 전국의 유관단체와 아울러 장애자 단체와 푸른하늘가족모임 임직원 및 전국지부 회원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특히, 이 행사가 성공리에 마칠 수 있도록 행사경비 일체를 조건 없이 협찬해 주신 (주)일화에 깊은 감사와 경의를 표합니다.
참고로 본 행사의 규모와 개요를 옮깁니다.
1. 행사기간---------1987年 10月 3日~1987年 11月 8日(37日間)
2. 실주행일수-------33日間
3. 총소요거리-------1917km
4. 총주행거리-------1762km
5. 차량이송거리-----155km
①정주-광주구간----10.12.사고로 인해 차량이동.
②휠체어 이동이 불가한 비포장 도로 및 산악도로 이동
③사고후 회복기간이송<소구간별>
6. 구간별 최장거리--------92km(인제-춘천구간)
7. 구간별 최단거리--------29km(청평-구리구간)
8. 일일평균주행거리-------53.39km
9. 행사 총인력동원---------11,965명
①행정기관
②장애인단체
③학생
④시민
10.경찰인력
①순 찰 차: 129대
②사 이 카: 114대(경찰오토바이)
③경찰병력: 272명(도로배치 된 인력제외)
11.행사총소요경비------23.793.860원
상기에서 기록한 바와 같이 위의 행사는 국공립기관과 사회단체와 장애인기관 및 유관단체와 국민 모두의 협조와 지원으로 마칠 수 있었습니다.
뜻을 모아 움직인다면 태산도 움직일 수 있습니다.
이 행사는 국내 최초로 본인이 기획하고 준비하여 아래와 같이 3년여에 걸쳐 성공을 하였습니다.
제1차 부산-서울(1985. 9. 29.~10. 9.) 620km
제2차 제주-서울(1986. 3. 18.~4. 6.)740km
제3차 1987년10월 3일 부터 11월 8일 까지 전국2000km 완주를 끝으로 국내 휠체어국토종단을 모두 마쳤습니다.
국토종단만세! 장애인만세!!